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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큰헤이드호의 정신

haagam 2014. 6. 2. 13:32

 

 

1852년 2월 27일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근처 바다에서 침몰한 영국 수송선 버큰헤이드 호가 침몰하였다. 새벽 2시의 한 밤중의 일이었다. 배는 완전히 허리통이 끊겨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선체의 앞부분은 이내 바닷속으로 침몰 되었으나 사람들은 그 사이에 가까스로 뒷 쪽으로 피신을 했다.

 

선상의 병사들은 거의 모두가 신병들이었고 안되는 장교들 조차도 그다지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이들 뿐이였다. 남아있는 구조선은 3척 밖에 없었는데 1척당 정원이 60명이니까 구조될 수 있는 사람은 1백80명 정도가 고작 이였다.

 

 

남아공 케이프타운 65km 해상에서 암초에 부딪쳐 가라안기 시작한 배는 영국 73보병연대 소속 군인 472명과 가족 162명 모두 합해 634명이 타고 있었고, 그중 부녀자 수는 130여명이었다. 당시 구명 보트는 단 3대로, 60명씩 180명만 탈 수 있었습니다. 탑승자들은 저마다 먼저 보트에 타겠다고 몰려들자 누군가 북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선장인 시드니 세튼 대령은 500명의 전 병사들을 갑판 위로 집합시켰다.

 

오와 열을 정확하게 맞춘 병사들은 캡틴의 명령에 따라 한치의 동요 없이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그동안 한 쪽에서는 횃불을 밝히고 부녀자들을 3척의 구명정으로 하선시켰다. 이때 함장 세튼 대령이 외쳤다.

 

“구조선에는 여자와 어린이들을 먼저 태운다.  그리고 너희들은 여기에 남는다.

 만약 너희들이 구조선에 타려고 뛰어들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들도 서로 뛰어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 아내와 자식들도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자! 그럼 너희들이 이곳에 남고 너희 가족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너희도 구조선에 뛰어들어 모두가 함께 죽을 것인가 이것 뿐이다.”

 

전 병사가 질서있게 정렬한 가운데 부녀자와 아이들이 3척의 구조선에 나눠탔다. 마지막 구조선이 배에서 멀어지기 전 한 병사가 소리쳤다.

 

“대령님! 저희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대령님은 어서 구조선에 오르셔서 남아있는 저희 가족들을 지켜주십시오.”

“나는 내 아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다. 이곳에서 자네들과 함께 명예롭게 운명을 같이 할 것이다.”

 

그 후 세튼대령은 병사들 중 어린 병사들을 지목하며 배에 타기를 권했지만 그들 역시 눈물만 흘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 구명정이 그 배를 떠날 때까지 갑판 위의 사병들은 사열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부동자세를 취하며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구명정에 옮겨탄 부녀자들은 갑판 위에서 의연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다.  결국 함장을 포함한 군인 470여명은 구명보트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며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항해 중에 재난을 만나게 되면 영국인들은 상대방의 귀에 대고 조용하고 침착한 음성으로 '버큰헤이드호를 기억하라'고 속삭인다고한다.  '여자와 어린이가 먼저'라는 숭고한 전통은 이처럼 고귀한 희생위에 얻어진 것이다.

 

 버큰헤이드호의 이야기는 영국은 물론 곧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해져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버큰헤이드호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기념비가 각지에 세워졌다.

 

'여자와 어린이가 먼저'라는 훌륭한 전통이 1852년에 이 버큰헤이드호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 그 후로 수 많은 인명을 살려 낸 것이다. 해양국가인 영국의 해군에서 만들어진 이 전통 덕분에 오늘날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명이 죽음을 모면해 왔다. 이 전통은 다시 한번 그 가치를 발휘하였다.

 

역시 영국군 수송선 <엠파이어 윈드러쉬호>가 어느 날 아침 6시경 알제리아 해안 약80km 해역을 항해하고 있을 때였다. 日出을 구경하려고 일찍 일어난 승객들은 그 순간 갑자기 갑판이 흔들리면서 배가 튀어오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곧이어 검은 연기줄기가 깨어진 나무 틈 사이로 올라왔다. 그리고 우르릉 하는 울림 소리가 배의 중앙부에서 들려 왔다. 놀라서 우왕좌왕하는 선객들에게 밑의 선창 출구로 한 선원이 비틀 거리며 올라왔다. 그는 이미 머리털과 눈썹이 타 없어졌고 한쪽 뺨이 불에 익어 벗겨져 있었다.  그 사내가 외쳤다.

 

"불이야!"

"보일러실이 폭발했소!"

 

보일러실에서 일어난 폭발로 금방 배 중앙부는 불길에 휩싸였다. 윌리엄 윌슨 선장은 불길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윌슨 선장은 최후의 단안을 내려 배를 포기하도록 명령했다. 인명구출작업이 시작되었으나 그것은 지극히 비관적이었다. 승객과 선원을 합하여 그 배에는 총 1천 5백 15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중에 여자가 1백25명 어린이가 87명 그리고 병약자가 17명이었다. 구명정은 12척이였다.

 

많은 구명정과 구명대가 불길 저쪽에 있었던 것이다. 구명정은 여러 종류여서 정원이 49명부터 1백명까지였다. 그렇다고 해도 구조대상은 전체 승객에 비해 극히 제한된 숫자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역시 물고기밥이 될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형편이였다. 그러나 승객들은 모두들 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구명정이나 구명대로 뛰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승선군대 사령관 로버트 스코트 대령이 메가폰을 잡았다.

 

"지금 우리는 버큰헤이드 연습을 실시중에 있습니다.

누구든 갑판 위에서 움직이지 말고 서계십시오.

구명전 지정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승객 중의 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부인이 남편인 영국 사관에게 버큰헤이드 연습이 어떤것이냐고 물었다. 그 장교는 자기 부인에게 버큰헤이드 연습이라는 말의 의미를 전부 알려 주지는 않았다. 이 말은 배를 포기할 극한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사용되는 말로서 부녀자들 모두 구명정에 무사히 태울 때까지 어떠한 위험이 있더라도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엠파이어 윈드러쉬호> 위의 남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을 훌륭히 지켰다. 군인들이 갑판 위에 정렬하여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동안 민간 선원들은 연기 속에서 절반 장님이 된 채로 자기 위치를 지켰다. 구명정 담당 선원들이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인도하여 구명정에 태웠다. 대열에 서 있는 남편 혹은 아버지들은 구조선이 늦게 도착할 경우 그 동안 아내와 자녀들이 몸을 덮는 데 쓰게 하기 위하여 웃옷을 벗어 구명정 쪽으로 던져 주었다.

 

이윽고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병약자들이 모두 구명정으로 옮겨탔다. 그런데 구명정에는 약간의 자리가 남았다. 문제는 병사들과 선원들 중에서 누구를 그 구명정에 태울 것인가 하는데 있었다. 장교 한 사람이 사령관에게 물었다.

 

"어떤 순서로 사람을 태울까요? "

" 물론 장례식 순서부터 따라야지. 제일 젊은 사람부터!"

 

스코트대령은 이와 같은 비상시에 적용해 온 영국의 오랜 규칙을 생각해냈다. 장교들은 사열을 하면서 젊은이들을 지명하여 구명정으로 가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였지만 병사들은 침착한 행동으로 질서를 잘 지켰다. 마지막 구명정에 정원이 다 타고 났을 때 갑판위에는 아직도 300명의 군인과 선원들이 남아 있었다. 구명정들이 모선을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그들은 영국 군인의 자제력을 훌륭히 발휘하여 마음속의 감정을 조금도 들어내지 않았다.

 

윌슨 선장은 배를 돌아다니며 혹시 낙오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이 없는가를 살폈다. 그의 복장은 이제 걸레 쪽이 되어 있었고 구두도 불에 타서 창이 떨어져 나가 발이 보일 지경이였다. 그는 선원들에게 명령하여 나무통 판자 그리고 무었이던지 물에 뜨느 물건은 모조리 바다로 던지게 했다. 부하들과 선원들이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스코트 대령이 병사들에게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상의와 구두를 벗고 바다로 뛰어내려라. 그러나 누구든 결코 구명정으로 헤엄쳐 가서는 안된다.!"

 

불길에 쫓긴 병사들은 차례차례 물로 뛰어 들었다. 한 늙은 갑판 선원은 의자들을 밧줄로 묶어 물에 빠진 사람들이 매달릴 수 있는 임시구명대를 골몰하고 있었다. 그 일이 끝나자 그도 물로 뛰어 들어갔고 그 뒤를 따라 스코트 대령과 윌슨 선장이 마지막으로 배를 버렸다.

 

"당황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인간의 자제력은 과연 훌륭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것이었다."

 

윌슨 선장은 후에 그 때의 상황을 이 한마디로 표현했다. 공교롭게도 사건 현장 주위에는 다른 배가 한 척도 없었다.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8시15분경이였다. 저 만치 구명정 위에서 요란한 환성이 터져 올랐다. 저 멀리 수평선위에 한 화물선이 이쪽으로 숨가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30분 뒤에 다른 배 3척도 또 나타났다. 물에 떠 있는 사람들의 구조에는 조심성과 시간이 요청되는 법이다. 10시 15분에 최후의 생존자가 구출되었다. <엠파이어 윈드러쉬호>의 불덩어리가 된 선체는 그 때 물속으로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었다. 결과적으로 처음 보일러 폭발 당시 사망한 네 사람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않았다. 버큰헤이드 연습이 성공한 것이다.

 

버큰헤이드 전통을 이야기함에 있어 저 유명한 <타이타닉호>의 비극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1912년 4월 14~15일의 일이었다. 2천300명이란 엄청난 수의 승객이 떼죽음이 일어날 판이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승객과 선원들은 버큰헤이드의 전통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여자와 어린이가 먼저'라는 불문율을 어김없이 지켰다. 세계적 명성을 가지고 있는 명사들이 최하등 선실의 이민 가는 가난한 부인들을 위하여 생명을 포기하였다.

 

보일러실과 기관실을 맡고 있던 37명의 기사들은 모두 죽는 순간까지 제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7명의 악사들은 침몰하는 배의 갑판 위에서 찬송가를 연주 하였다. 그들 역시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 승객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1천 5백명의 건강한 남자가 비참하게 모두 수장되었다. 버큰헤이드의 아름다운 전통이 살아 있었던 때문이었다. 자제와 용기 ㅡ 이것은 비상시 직면할 때마다 영국 국민들이 충실히 지켜 내려온 자랑스런 전통이다. 

 

영국이 선진국인 이유는 경제대국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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