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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에 대한 예배(황지우)

haagam 2011. 9. 21. 17:50


소나무에 대한 예배

( 황지우 )

 

학교 뒷산을 산책하다, 반성하는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위에 가장 기품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

이 시를 두고 김용택 시인은 '날마나 진저리쳐지는 살아 있음의 모욕이여!'라 말했다.

시인이 싯구의 줄을 바꿔 쓴 곳도 의미를 둔 것일까? '학교 뒷산을 산책하다'를 쓰고 쉼표를 쓴 다음 반성하는 자세로...로 이어나갔다.

 

원래는 연이 없이 이어진 시를 가독성을 위해 나눠 놓았다.

살아 가면서 속상한 일과 사람을 품에 안으면서 겪는 아픔은흔한일이지만,

이를 소나무에 대한 예배라 표현한 것은 재미있고, 마음을 삮이려 학교 뒷산으로 올랐다는 것도 눈에 들어온다.

 

그래, 시인은 '너 있는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나를 휘어지게 할지라도' 땅위에서 '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기품있게' 유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머리에 눈을 털고 잠시 진저리를 친다고 했다.

 

눈이 오는 학교 뒷산을 걸으면서 시인은 눈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휘어진 가지를 보며, 그것이 인내의 아픔이라는 생각을 한 것일까?

 

요즘은 눈이 오는 양이 엄청나서 눈으로 나무가지가 부러지기도 하고, 쓰러져 죽기도 한다.

시인이 만난 시절에는 그런 폭설은 아직 없거나, 기억에 두지 않았나 보다.

그러나 부러지거나 쓰러지는대로라도, 소나무는 역시 건목이다.

 

*

 


황지우 黃在祐(1952~ )

1952년 전남 해남 출생. 본명은 황재우(黃在祐)

 

서울대 미학과 및 서강대 대학원철학과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하고, 같은 해 문학과 지성에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를 발표하며 등단. 1983년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로 김수영문학상 수상.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기법을 통해 풍자와 부정의 정신 및 그 속에 포함된 슬픔을 드러내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대를 풍자하고 이상향을 꿈꾸는 그의 시에는 정치성 종교성 일상성이 고루 배어들어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뼈아픈 후회>, <거시기> 등이 황지우와 함께 자주 보이는 시들이다. 한예종 총장을 사퇴하는 등의 어려움이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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