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나눔

오직 백성만 사랑했던 가슴 따듯한 연기현감, 허만석

haagam 2025. 2. 22. 16:29

조천교에서 바라본 허만석로 도로표지판

 

신도시 세종시에 이사와 살면서 이따금 나가보는 조치원길에서 만난 도로표지판 "허만석로"는 문득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다. "아니 세종시에도 이렇게 사람 이름을 적용한 도로명이 있다니 과연 누구일까?" 이런 호기심은 비단 나에게만 생기는 것은 아니리라.

 

 허만석로는 세종시 조치원읍과 청주시 오송읍으로 이어지는 36번 도로 중의 일부로 조치원 동쪽을 감아도는데,  즉 번암삼거리에서 시작하여 조치원 체육공원, 조천교를 지나 세종고등학교 옆 고가를 통해 홍익대학교까지 약 5.057㎞ 구간을 말하는데 이 도로는 조치원읍 주민과 역사를 같이한 조천鳥川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자연스럽게 허만석을 조사하다가 너무 가슴 뭉쿨하고 감동적인 스토리를 발견하고 결국 이렇게 포스팅하게 되었다.

 

허만석은 600여년 전인 1427년(세종9년) 7월 21일에 연기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조치원을 깊숙하게 감아 흐르는 조천鳥川 변에 방죽(제언堤堰)을 쌓아서 폭우에 따른 농경지의 유실을 막고, 농업용수를 넉넉하게 공급하여 가뭄에 대처할 뿐만 아니라, 수로水路를 직선화해서 농지를 확장하는 등 현대판 농업 종합 개발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여 당시 연기현 백성들의 삶을 안정화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연기현감 허만석이 부임할 당시 조치원읍 일대는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는 조천 물이 범람하여 농작물이 유실이 잦았을 뿐 가뭄에도 도움을 주지 못해 주거에 적합하지 않았다. 지금도 전통적인 마을은 읍의 서쪽 고지대인 봉산리와 침산리 등에 형성되어 있으며, 조치원역 전방의 도심지는 대개 일제 강점기에 하천 제방공사가 완비된 후에 형성된 마을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조천천 물길은 서쪽 읍내 중심지 가깝게 흘렀으며, 천의 폭이 넓고 깊어 조선 말기에는 전라도 새우젓 배가 왕래하였고, 중국인들이 배를 타고 들어와 처자들을 희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현 죽림리의 1872년 연기현 지도에는 배를 대었던 죽내점竹內店이 표기되어 있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편 37권을 보면 "세종9년 7월 21일(1427년) 안변부사 김효성과 연기현감 허만석 등이 사조하니 임금이 불러보고 말하기를 요사이 한재旱災로 인하여 백성들이 산업을 잃었으니, 각기 마음을 다하여 기근을 구제하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安邊府使金孝誠、燕歧縣監許晩石等辭, 上引見曰: "近因旱災, 民失産業, 其各盡心賑飢") 

 

사조辭朝란 임지에 부임하기 전 임금께 올리는 하직 인사라나. 아하 당시에는 이렇게 표현했었구나! 특히 당시에는 가뭄으로 온 백성들이 엄청 어려운 형편이었나보다. 

 

연기현감으로 부임한 허만석은 임금 세종의 명에 따라 조천의 관리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연기현 명환名宦’ 편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본조 허만석許晩石의 정사는 근검을 위주로 하였다. 현 북쪽 15리에 냇물을 막가 큰 방죽(堤堰제언)을 만들어 천 경頃 남짓한 논에 관개灌漑하였는데 그 방죽이 청주 지경에 있다.

처음 방죽을 쌓을 적에 만석이 몸소 이를 감독하니, 청주 사람 천명 백명이 떼를 지어와서 불손不遜한 말을 하고, 만석이 걸터앉은 호상胡床(당시의 관료용 접의자)을 꺾어버리므로 만석이 활을 당겨 쫒으니 청주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방죽이 이루어지자, 백성들이 그 몽리蒙利에 힘입어 지금껏 칭송하고 있다."

 

같은 내용이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牧民心書)』 「공전육조」 천택 편에도 소개되는데 조선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인 치수 사업을 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즉 연기현감 허만석은 청주 땅에 속해 있는 지역에 방죽을 쌓아 연기현에 넓은 농경지에 농업용수 공급 기반을 마련하였다는데, 그 관개가 가능한 지역이 1천경이라 하니, 당시 세종 주척에 따르면 1보=5척, 1묘=240보, 1경=100묘로서 1경의 넓이는 23,945제곱미터로 추정되므로 1천경은 약 25㎢에 이르는 광대한 토지였고,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방죽이 청주 땅 쪽에 걸쳐 있었고, 청주 사람 천명 이상이 떼를 지어 항의할 만큼 청주 지역에는 불리했었나보다.

 

당시 허만석 현감이 쌓은 제언이 어디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872년 연기현 古지도에서 조천에 접해 있는 저치제언은 다른 제언과 달리 붉은 색으로 표기되어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 있어 저치제언이 허만석 현감의 방죽일 것으로 추정되며 그 위치는 평리 일대인 것으로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안일을 극복하고 대의를 위해 소임을 다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당시 청주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현감의 의자를 꺾어 부수었다니 당시 상황의 어려움들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오늘날의 환경과 견주어보면 시멘트나 철근 등과 같은 건축자재도 없었고, 레미콘이나 포크레인 같은 중장비도 없었으리라.
백성들을 동원하는데 필요한 예산이나 인력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서에 저치제언苧峙提堰 또는 모치제언茅峙堤堰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띠풀 또는 잔디를 의미하니 필자의 짐작으로는 흙과 돌 그리고 잔디를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리라 보여진다.
또한 현감 허만석은 명령에 그치지 않고 공사 현장에 직접 임장 감독함은 물론, 청주사람들의 적극적인 반대 시위에 직접 활을 쏘아대며 저지시켜 공사를 완공하게 한 점도 예사롭지 않다.
제언공사 이후 넓어진 농지와 풍부한 농업용수, 그리고 여름철 폭우의  범람으로부터 자유로와진 안전한 농지는 연기현내 백성들에게 얼마나 놀랍도록 고맙고 신천지같은 변화였을까?
이전의 연기현감들은 왜 이를 이루지 못했을까? 그 이후 현감들은 이 방죽의 유지 보수 및 확충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노력했을까? 등등을 생각해보면 허만석 현감의 공직자로서의 올곧은 소명 의식과 책임감, 그 속을 관통하는 백성을 사랑하고 어려움을 보살피려는 따듯한 마음이 느껴진다.
세종시에서 조천 근방을 허만석로로 명명한 것은 단순히 연기현에 큰 치적을 남기신 훌륭한 현감이었다는 점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의 이면을 짐작해보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귀감이 되게 하는 인물이고, 이 도로를 지날 때마다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되는 곳이라 생각하게 된다. 요즘같은 시대에 더욱 그리워지는 분이다.

 

참고문헌

조치원읍지(2012)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7권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 https://sejong.grandculture.net/sej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