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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그린 그림

모래밭에서(이진명)

haagam 2012. 10. 31. 11:01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갑자기 알아 차리게 된 이즈음

외롭고 슬프고 어두웠다.

 

나는 헌 것이 되었구나

찢어지고 더러워졌구나

 

부끄러움과 초라함의 나날

모래밭에 나와 앉아 모래장난을 했다.

 

손가락으로 모래를 뿌리며 흘러내리게 앴다.

쓰라림 수그러들지 않았다.

 

모래는 흘러내리고 흘러내리고

모래 흘리던 손 저절로 가슴에 얹어지고

머리는 모랫바닥에 푹 박히고

 

비는 것처럼

비는 것처럼

헌 것의 구부린 잔등이 되어 기다리었다.

 

모래알들이 말했다.

지푸라기가 말했다.

 

모든 망가는 것들은 처음엔 다 새 것이었다.

영광이 있었다.

 

영광, 영광

새것인 나 아니었더라면

누가 망가지는 일을 맞아 해낼 것인가

망가지는 것이란 언제고 변하고 있는 새것이라는 말

영광,영광

 

나는 모래알을 먹었다.

나는 지푸라기를 먹었다.

 

(모래밭에 서면, 이진명)

 

*

 

화자의 외롭고 슬프고 어두운 마음 상태를 세세히 그린 시다.

언제부턴가 자신이 쓸모없고 볼품없는 헌것이 돼 버렸다고 생각하게 된 화자는 망연히 발길을 옮기다가 동네 놀이터의 모래밭에 들어가 쪼그려 앉는다.

서 있을 기운도 없었겠지만, 문득 그 자리에서 머리를 길바닥에 처박고 가슴을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힘들었을 것이다.

마침 모래밭이어서 다행이다.

모래는 흘러내리고 흘러 내리고, 손가락 새로 흘러 내리는, 마치 시간의 입자같은 모래알들의 하염없는 감촉이, 아마도 시간에 상처를 입은 화자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었으리라.

 

<동아일보 2012.10.31. A30면, 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21>에서 옮겨오다.

 

*

 

이진명(1955~)

서울 생, 서울예술전문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0(35세) <작가세계> 여름호 제1회 신인으로 <저녁을 위하여>외 7편의 시 발표 등단

제4회 일연문학상, 제2회 서정시학작품상 수상.

저서;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민음사, 1992),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문학과 지성사, 1994), <단 한 사람>(열림원, 2004), <세워진 사람>(창비, 2008)

 

(학바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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