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자전거

어머님 간병 소고 본문

생활나눔

어머님 간병 소고

haagam 2010. 10. 20. 12:51


어머님께서 수술실로 들어가시는 모습이다.

자식들이 모여서 잘 다녀오시라 인사드리는데, 왠지 가슴이 뭉쿨하고 안타까운 느낌이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스마트폰을 급히 잡았다.

 

큰 병은 아니지만 연세가 있으셔서 수술을 결정하는 일은 어려웠다.

 

어머님을 설득하는 일

이 병원에서 수술을 잘 해줄 수 있을지를 확신하고 병원과 집도의를 선택하는 일,

지금 상태로 수술이 잘 된 이후에 회복이 가능하실까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일

그리고 자식들과 동의를 구하는 일

모두 순간적으로 결정해야 할 일들이었다.

 

모든 일을 결정하고 잘 다녀오시라 손잡아 드리면서 수술실로 들여보내며 느끼는 감정은 그냥 안타까움 뿐이었다.

 

어머님은 수술을 하시고 8일간을 회복 기미를 보이시지 않다가

어제 저녁에서야 겨우 미음을 드시고,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목소리를 좀 키우셨다.

 

그동안 수액에 의존하시면서 혹시나 해서 죽을 조금 드리면 이내 토하시거나 설사하시고,

열이 내리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젊은 사람같으면 수술 후 2일만 지나면 곧바로 퇴원이 가능한 일이라 들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회복 기미가 없어

혹시나 하는 우려로 여러 자식들이 다녀가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긴장되어 시간이 나는대로 오가면서 안타까운 시간을 보냈다.

 

어머님은 뭐라 말씀을 많이 안하시고 가만히 누워 계시고, 묵주를 잡고 기도하시고, 바쁘니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하실 뿐이었다.

 

당신 자신에 대한욕심이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얘기는 일체 없으시고, 그저 자신이 아픈 일에 충실하면서 평안하게 계신다는 느낌이었다.

 

조석으로 병실을 드나들면서 하는 일이란 우선 빈틈없이 잘 돌봐드려서 전처럼 잘 지내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일이지만,

정말 자식된 도리로서 안타까운 일은 어머님의 아픔을 같이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만히 누워있는 어머님을 마음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그냥 무감각하게 뵙고 온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 것인가. 그러나 나는 이런 말을 하면서도 진정으로 어머님의 아픔을 같이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죄스럽고 안타까왔다.

 

어머님은 내 평생에 다시 뵙기 어려운 훌륭하신 분이셨다.

어머님은 어디에 계시더라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늘 존경을 받으셨다.

 

아버님의 사업이 어려워져 시골로 이사를 와서 처음 혼자서 농사를 지으시면서도 주위 남자 어른들로부터 늘 존중을 받으셨다.

 

노년에 혼자 계시면서 무료하거나 외로왔을 숱한 시간을 묵주를 들고 자식과 주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일과, 돋보기 쓰고 성경을 필사하시고, 여러차례 성경을 소리내어 읽으시면서 자신을 지키셨다.

 

작은 생활비를 아껴 모으셔서,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면서 손자들에게 몫몫으로, 그리고 우리에게도 큰 돈을 선뜻 전해주시면서 격려해주시고, 몇해 전에는 내게도 승진을 축하한다면서 비싼 양복을 사 주셨다.

 

주위 휴지를 줍는 아주머니가 앓아 눕자 방문하시어 따듯하게 위로해주신 적이 있었는데,그 아주머니는 어머님의 정을 잊지 못하고 스스로 수양딸이 되어달라 하는 아주머니 이야기도 감동적이고, 독거노인 방문 아주머니들이 어머님에 대해 깍듯한 예우를 갖추는 모습도 예사스럽지 않다. 아름아름 소식을 물어 어머님 문병을 오셨는데 그분을의 말씀이나 태도는 매우 고마왔다.

 

세상에 태어나서 남자는 일로, 여성은 사랑으로 세상을 대한다.

목숨을 걸고 아기를 낳고, 모두를 걸고 자식과 남자와 이웃을 사랑한다.

그렇게 세상을 남성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변화시키는 신비한 힘을 갖는다.

 

공자의 논어 입교편 立敎編에 상기유례 喪紀有禮 이애위본 而哀爲本 라는 말을 좋아한다.

 

상을 당해서는 예가 있어야 하는데 슬픔이 근본이 된다는 말이지만, 나는 이 말을 어디에 있던지 그 장소의 목적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말로 적용해서 처신하는 기준으로 삼고자 노력한다.

 

나는 어머님께서 편찮으신데 대해마음으로 같이 아파하지 못함이 죄스럽다.

어머님의 쾌차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