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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英陵)과 영릉(寧陵)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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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英陵)과 영릉(寧陵)

haagam 2019. 6. 22. 12:52

조선 4대 세종대왕능은 영릉(英陵)이고 조선 17대 효종대왕능은 영릉寧陵이다.

그리고 이 두 능은 한 곳 여주에 있으며, 사적 제195호로서 문화재청 세종대왕유적관리소가 있다.

The royal tomb of King Sejong

The royal tomb of King Hyojong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世宗) [1397~1450(71세), 재위 1418~1450(32년)]과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51세)의 능이다. 하나의 봉분 아래 석실 2개를 붙여 왕과 왕비를 함께 안치한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영릉(英陵)은 1469년(예종1년)에 이곳으로 옮겨올 때 봉분 내부를 석실에서 회격灰隔(관棺과 광중壙中 사이에 다져넣는 석회분 형식)으로 바꾸어 조성하였고, 석물 중 망주석, 장명등, 석수, 석인은 단릉처럼 배치하였으나 혼유석魂遊石만 2개를 설치하여 합장릉임을 나타내었다.

  영릉(英陵)은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는 능으로,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에 기록된 제도를 따랐다. 봉분 둘레에는 난간석을 두르고, 횡석주를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능의 위치를 살펴보면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주산인 칭성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으로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세조 이후 영릉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서거정 등의 반대로 옮기지 못하다가 1461년(예종1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매년 4월이면 세종대왕릉 오른쪽 능선을 따라 우리나라 대표적인 봄꽃인 진달래가 아름답게 무리지어 푸른 소나무와 어우러진 장관을 연출한다. 평소에는 비공개지역이라 들어갈 수 없지만, 진달래가 활짝피는 4월 중순부터 말까지 10여일동안 진달래동산을 개방한다.

 

  영릉을 여주로 옮긴 후 그 능지가 천하의 명당이라 조선의 국운이 100년이나 더 연장되었다며 영릉가백년이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영릉은 장헌대왕(세종)이 묻힌 곳인데, 용이 몸을 돌려 자룡을 입수하고 신방에서 물을 얻어 진방으로 빠지니 모든 능중에 으뜸이라 적혀있다.

 

  양력 4월 8일은 세종대왕의 기일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주관으로 매년 기신제를 거행한다. 옛부터 이어져 온 제례는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소헌황후의 기신제는 4월 28일에 거행한다.

 

 매년 5월 15일 세종대왕 탄신을 기념하는 국가 제향인 숭모제전이 거행된다. 숭모제향과 더불어 궁중음악, 무용을 비롯한 다채로운 부대행사가 열린다.

 

  한글날인 10월 9일에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는 한글날 경축 행사가 개최된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인 한글 창제에 관련된 공연, 전시, 체험행사들이 함께 열린다.

 

  세종대왕은 1397년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4남4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도, 자는 원정이다. 1418년 와에자로 책봉되었고 같은 해 8월 10일 조선 4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21세)

  세종대왕은 재위 32년동안 정치 사회 경제 등에서 쌓아올린 눈부신 업적을 바탕으로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중 한글의 창제는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손꼽힌다.

 


 

  효종대왕은 인조와 인열왕후 사이에 2남으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淏호이고 자는 정연靜淵이다. 1645년 효종대왕인 형의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죽자 같은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대왕이 돌아가시자 조선의 제17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효종대왕은 재위 10년간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복구하는데 온 힘을 쏟았는데, 군제를 개편하여 군사 훈련 강화에 힘썼으며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을 실시하였고, 상평통보를 널리 쓰이게 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효종대왕은 대군 시절에 형인 소형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8년간 생활하면서 국제 경험을 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북벌을 계획하면서 군사력을 키우는데 역점을 두었다. 효종의 북벌 의지는 송시열의 <기해독대>에서 잘 나타났는데, 효종은 정예화된 포병 10만명을 길러 기회가 있을 때 오랑캐들을 곧장 공격할 것이며 이 일은 10년 안에 추진할 것이라 말한다. 효종의 이러한 꿈은 그가 41세에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계획으로만 남았다.

 

  의궤란 나라에서 큰 일을 치룰 때 후세에 참고하도록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 경과를 자세하게 적은 책을 의미한다. 지난 2011년 반환된 외규장각의궤를 전시하고 있다. 국장행렬을 입체적으로 구성한 영상을 통해 당시 행렬의 규모와 배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혼유석과 상석

혼유석魂遊石이란 분묘 시설의 하나로 상석床石 뒷쪽 무덤 앞에 놓은 직사각형의 돌로,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설치한 것이다. 사례편람 상례 성분조 세속에 보면 혼유석은 상석 북쪽에, 향안석은 상석 남쪽에 둔다고 기록되어 있다. 보통 화강석이다. 묘제 대에는 후손이 제소를 흠향歆響하는 자리이다. 왕릉에는 혼유석을 사용하지 않는다.

상석과 혼유석

**동자석주: https://blog.naver.com/oineksn/220730803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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