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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설날(김이듬)

haagam 2013. 6. 12. 10:13

 

 

올해는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리
올해는 술을 줄이고 운동을 하리
계획을 세운지 사흘째
신년 모임 뒤풀이에서 나는 쓰러졌다
열세 살 어린 여자애에게 매혹되기 전 폭탄주 마셨다
천장과 바닥이 무지 가까운 방에서 잤다
별로 울지 않았고 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날마다 새로 세우고 날마다 새로 부수고
내 속에 무슨 마귀가 들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주문을 외는지
나는 망토를 펼쳐 까마귀들을 날려 보낸다
밤에 발톱을 깎고 낮에 털을 밀며
나한테서 끝난 연결이 끊어진 문장
혹은 사랑이라는 말의 정의(定義)를 상실한다

설날의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서럽고 원통하고 낯선 날들로 들어가는 즈음
뜻한 바는 뺨에서 흘러내리고
뜻 없이 목 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백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려운 이성의 횡포
수첩을 찢고 나는 백 사람을 사랑하리
무모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며
마실 수 있는 데까지 마셔보자고 다시 쓴다

 

*

김이듬(1969~, 45세)

여, 시인

경남 진주생

2001년 계간 포에지 '욕조 a에서 달리는 욕조 A를 지나' 등단

 

*

나는 시집에서 시를 찾은 경험이 적고, 오히려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된 싯귀를 통해 시를 만나곤 한다.

이 시는 아침신문 동아일보 <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에서 만났다.

 

나는 이렇게 쉽고 마음에 가까이 와닿는 시가 좋다.

아무나 느끼는 일상적인 감정, 그리고 나도 할 수 있는 쉬운 말로 쓰여야 최소한 나는 읽기 좋다.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자아내고, 또는 위안을 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시인이라 말하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이정도의 시는 누구라도 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아니 최소한 나정도의 사람이라면 이런 느낌을 이런 정도로 표현하는 일이 일상적인 수준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설날 아침을 맞으면서 왜 첫 말을 <올해는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으리>라 했을까?

시인에게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삶에 큰 짐이었을까?

아니면 사랑하는 일이 삶에서 큰 비중이었을까?

시인은 이 시를 몇살에 썼을까?

남자같은 말을 하고 있는 시인은 여자였구나.

 

그러나 시인은 이 시의 말미에서 다시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의외로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일은 백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어려운 이성의 횡포 수첩을 찢고 나는 백 사람을 사랑하리>로 맺는다. 사랑을 하지 않는 어려움을 <이성의 횡포>라 했다.

이때의 이성은 동성에 반대되는 다른 성으로서의 본능적인 사랑에 대한 유혹으로서의 이성이었을까? 감성에 대응하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정신 체계를 의미하는 이성이었을까?

 

시인이 설날 약속한 일들을 사흘도 못되어 깨부수거나, 또는 스스로에게 약속해야만 하는 환경들, 그리고 사랑에 대한 갈등 등을 말하지만, 까마귀를 날려보내며 시인이 설날이라는 말에서 서럽고 원통하다는 말을 생각할만큼 삶에서 느껴지는 서로움과 원통함은 무엇이었을까?

 

시인은 술꾼일까?

시를 쓴다는 일은 이렇게 자신을 토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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