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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인 것에 대하여(정홍수)

haagam 2015. 8. 12. 14:38

 

 

 

고영의 시 <탈모>를 읽는 일은 재미있다.

 

살아생전 유난히 돛을 좋아하시던 어머님이 하늘 정원에서 꽃나무를 심으시나보다.

자꾸

내 머리카락을 뽑아가신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탈모에 대한 전혀 반격적인 표현이다.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을 어머님과 연관하여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을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속상한 마음의 반전이다. 최정례의 <코를 골다>도 그렇다. 읽다보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이런 '유체이탈 화법'은 권장할만한 기법이다.

 

클리세라는 말은 인쇄의 연판을 의미하는 불어인데, 이를 어원으로 판에 박은 문구나 진부한 표현과 생각을 가르키는 말이 되었다. 원래 시인이란 이런 클리세, 즉 상투적인 표현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 말을 찾고 생각을 찾는 사람들이다. 진부한 표현에 의존하면 현실적인 생생함과 풍부함, 그리고 사실에 충실한 언어를 찾는 일은 중단된다.

 

상투어는 현실로부터 우리를 차단하고 생각으로부터도 우리를 차단시킨다. 우리의 일상이 어느만큼 상투어에 의존하며 살 수 밖에 없지만, 우리는 상투어 밖에서 우리의 생각과 말의 길을 찾는 노력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앞서 말한 현실적인 생생함과 풍부함, 그리고 사실에 충실한 언어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하면서 그의 말과 생각이 온통 상투성으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바 있다.  아이히만은 나치에 의해 주입된 선전문구나 관청 용어같은 공허하고 판에 박힌 말들을 지겹도록 반보갛면서 자신은 유대인 절멸 정책의 한 톱니바퀴였을 뿐이라 강변한다.심지어 그는 교수대 앞에서까지 나의 생각, 자신의 느낌으로 이루어진 말 대신 언젠가 남의 장례식장에서 들었을 법한 언설을 늘어놓는다. 지금 닥친 일이 자신의 죽음,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사실조차 잊은듯 하다.

 

한나 아렌트는 여기서 어리석음과 구별되는 <순전한 무사유>를 보며, 악과 사유할 능력을 잃어버린 무사유 사이의 이상한 연관성이야말로 아이히만 재판에서 글어내어야 할 역사적 교훈이라 이야기 한다. <사유할 능력>이 인간 내부의 또 다른 영역인 자아와의 대화이자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며, 말의 능력으로서의 인간의 인간다움이 여기에 기초한다는 사실은 굳이 어려운 논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의 부제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인데, 흔히 평범성으로 번역되는 banality가 진부한 말과 생각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해 둘만 한 지점인 것 같다.

 

얼마 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교회의 영결식장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중오범죄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추도사를 이어가다 문득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대통령은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말과 함께 노래를 시작했고, 탄성과 웅성거림 속에서 일어난 참석자들은 흑인 노예무역에 가담했다 회개한 영국 사제가 신의 은총을 찬미한 그 노래를 함께 불렀다. 감동적인 호응은 대통령이 희생자 한 사람 한 삶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에도 이어졌다. 인터넷에는 동영상과 함께 "이번 주 내내 저는 은총에 대해 생각했습니다."로 시작되는 추도사가 소개되었다.

 

이 말들에서 나는 슬품에 슬픔을 포개려는 한 개인의 간절한 생각의 시간과 흔적을 읽었다. 물론 그 추도사는 인종문제에 대한 뛰어난 정치적 호소이기도 했다. 현장의 한 참석자는 "그가 미국 대통령이어서 다행이다."라는 말을 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규격화된 관제 언어의 복창에 익숙한 귀에는 놀랍도록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국일보 8.10. <삶과 문화> <상투적인 것에 대하여> 정홍수 문학평론가의 글을 옮겨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