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자전거

조치원에 "명동"이라니 본문

카테고리 없음

조치원에 "명동"이라니

haagam 2025. 3. 30. 09:57

(조치원읍의 행정구역: 유난히 2자로 된 '리'가 7개나 되고, 3자 리명이 7개로 반반이다. 그림 위로 신안리가 있다.).

 

  신도시 세종시에 살면서 구도심 조치원을 보면 참 이상하다. 조치원읍은 과거 연기군의 군청소재지이고, 전통적인 상업도시로서 유규한 역사를 지닌 곳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살펴보면 보통 신안리 침산리 신흥리 번암리 서창리 봉산리 죽림리 등 3자로 된 리가 7개로 절반인데 비해, 남리 정리 명리 원리 상리 평리 교리 등 2자로 된 동네가 7개로 반반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동리 이름이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 곳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지도를 살펴보면 이들 7개의 2자로 구성된 동네는 모두 경부선 철도와 조천 사이에 그려진 길쭉한 타원 안에 위치해 있다는 점과, 촘촘하게 구획된 도로를 보면 이곳이 조치원의 중심지라는 것, 그리고 도로가 사방으로 사각형을 그리면서 잘 정리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과거 조천의 물길은 지금과 달랐다.

  과거 조치원은 1926년 전폭적인 제방공사를 하기 전까지 조천은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현재 조치원역 근처까지 깊숙하게 그리고 넓게 흘렀다고 한다. 1925년 이전까지 군민회관 사거리(원리 1번지 일원)에는 '오금소'라는 물웅덩이가 있었는데, 본래 이름은  저치제언(苧峙堤堰)이었는데 오금이라는 처녀가 억울하게 죽고난 이후 오금소로 불리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즉 띠풀잔디로 물을 가두기 위해 큰 제방을 쌓았다니 이곳이 제천의 물길을 짐작하게 한다.

  

  조천은 조치원읍의 북부와 중부 남부의 동쪽 경계부부터 흐른다. 조천은 번암리 일대에서 미호천에 합류되며 중부에 북동, 남서 방향으로 서창천이 흐르며 서창천은 평리 일대에서 조천과 합류된다.

  조천은 하천 동쪽 청원군 강외면 일대에 대규모의 범람원 평야인 서평뜰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평야는 조천의 동편에서 북동-남서 방향으로 흐르는 미호천이 형성한 범람원 평야인 농장들과 연접되어 연기군 일대에서 가장 대규모의 미작 지대를 발달시키고 있다.

  조천의 서쪽에 발달한 교리, 평리, 원리, 상리, 정리, 명리, 남리 일대의 조치원읍 시가지는 조천의 서측 자연제방 너머의 범람원 배후 습지를 일제 강점기에 매립해서 조성한 것이다.

  현재 과거 일제강점기의 지도 등을 검토해 봐도 연기현감 허만석이 쌓았다는 저치제언도 평리 일대일 것이라는 추측이 보편적이다. 

 

(조치원읍지 552쪽)

"조천천으로 새우젓배가 들어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평리에 거주하는 90세 주민이 부친에게 듣기로는 머리를 올린 중국인들이 배를 끌고 나타나면 물가에서 빨래하던 처녀들은 옥수수밭에 숨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1947년 대홍수로 금강이 범람하여 공주 일대가 물에 잠긴 일이 있었는데 상류지역인 조치원은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지만 곳곳에 물이 넘쳐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비만 오면 둑이 터질까 조바심을 느끼며 제방에 몰려 나와있곤 했고, 득이 흔들거릴 정도로 비가 내린 적도 있었고, 상류에서 홍수로 떠내려오는 돼지를 건져오는 사람도 있었다. 1960년대에는 군부대에서 둑을 더뜨릴 거라는 소문으로 피난가겠다고 난리가 났다. 매년 반복되던 홍수 걱정은 대청댐이 건설된 이후 비로소 사라지게 되었다.

 

조천천은 1970년대까지만해도 굉장이 맑고 깨끗했다.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물을 떠 마셨고 여름에는 제방아래 개울에서 목욕을 하며 더위를 식혔다. 남자와 여자가 따로 떨여져 있어 불편하지 않았는데, 1980년대초부터 상류에서 폐수가 유입되고 생활하수가 흘러들어 오염이 심각해졌다." 

 

(조치원 읍지582쪽)

"일제 강점기에는 지금의 명동초등학교 자리에 공설운동장이 있었다. 이 시기에 자전거 경기가 인기 종목으로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대회가 열렸고, 유명한 선수도 많이 배출되었다.

당시의 신문기사를 보면 1940년 5월 15일 조치원지국후원 자전차경기대회와 같은  해 5월 17일~18일 조치원청년친목회 주최 동아일보 조치원지국 후원 전조선 남녀 자전거 경기대회 등이 열리는 등 전국대회가 조치원에서 개최되었다."

 

조치원읍내에 대동학교, 교동학교, 명동학교 중 가장 먼저 세워진 교동학교는 조치원읍내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휘한 학교로 교사부터 학생까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그에 비해 대동학교는 조선인의 학교로 통했다. 가장 늦은 1940년에 '소화국민학교'로 인가받아 설립된 명동학교는 조치원역 앞에 번성했던 시장 사람들의 학교였다. 

조치원사람들은 이 세 학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학교에서 월사금 받을 때가 지나도 못 가져와 아이들에게 추궁을 하면 각 학교마다 대답하는 말이 달랐다. 교동학교 아이들은 '아버지 월급 받으면 드릴께요.' 대동학교 아이들은 '추수 끝나면 낼께요.' 그리고 명동학교 아디들은 '오일장 지나면 드릴께요.'라는 것으로, 당시 학생들의 가정 형편을 짐작하는 말이었다.

명동초등학교 터는 일제 강점기 광솔공장이 있던 곳으로 소나무에서 기름을 채취해 전시물품으로 공급하던 시설이었는데, 이 넓은 자리에 1945년 소화국민학교가 이전했고, 1947년에 명동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광복 후 전쟁이 벌어지자 명동학교는 미군이 주둔하여 자동차를 고치는 곳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전쟁 후의 명동초등학교는 연기군에서 가장 운동장 시설이 좋고 규모가 큰 덕에 연기군민체육대회가 열리는 장소로 활용되었고, 2005년이후 하수처리장에 건설된 운동장을 활용했다."

 

 궁굼한 마음에 우선 쉬운대로 조치원읍의 홈페이지에서 각 리의 유래를 설명한 글을 살펴보았다.

 

원리(元里)

원리는 조치원역이 있는 곳으로 이전에는 4일 8일 침산시장이 여린 곳이다. 1905년 경부선 조치원역 개설로 획기적 발전하여 1914년 조치원리, 1940년 본정2목으로 분리되어, 1947년 원동(元洞)으로, 1988년 원리(元里)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치원의 중심이라 원리라 햇다. 1940년은 일제강점기로 일본의 기조자치단체가 시정촌( 市町村)으로 구성된다는 점에 비추어 원리는 시골이 아니라서 정(町)을 적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원리(元里)는 조치원의 중심지 으뜸이 되는 마을이라는 의미라 한다.

 

상리(上里)
조치원5일장 변두리, 뗏집거리(띠치거리)
1914년 조치원리, 1940년 본정1목으로 분리, 1947년 상동, 1988 상리
과거 부근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지형(띠치거리, 띠풀언덕)이었다는데서 유래됨

평리平里
조치원장이 열리던 곳. 1925년 신-구 시장 합병 전까지 조치원 장터의 중심
1914년 조치원리, 1940년 소화정(昭和町)으로 분리, 1947년 평동, 1988 평리
평리平里는 뒷발(후평後坪)이라는 자연지명에서 유래됨.

교리(敎里)
읍의 중앙에 위치, 동쪽은 평리, 남쪽과 서쪽은 원리, 북쪽은 내창천과 연첩한 지역
조치원읍사무소 소재지, 조치원역 인접,
교동초, 조치원여중, 보건소, 우체국, 시민회관, 어린이놀이터, 현대.계룡,목화아파트, 제일련립 등이 위치,
과거에는 연기군청, 심상고등소학교, 우체국, 척식회사 등이 입지
1926녀 조천제방공사 축조 후에도 농경지로 활용되다 1960년 이후 농경지 매입으로 주택가 형성됨
1914년 조치원리, 1940년 길야정(吉野町), 1947년 교동, 1988년 교리로
교리는 학교(교동초,여고, 여중) 밀집 지역이라 하여 붙여짐.
심상소학교터, 연좌극장 터, 왕성극장 터, 교육청 터, 전신전화국 터, 연기군청 터, 조치원읍사무소 터, 조치원문화원터, 보건소 터, 등

정리(貞里)
연기현 북면 침산리 지역. 원리와 함께 침산장이 열린 곳. 1905년 조치원역 개설로 급발전
읍의 중앙, 동쪽은 명리, 남쪽은 남리, 서쪽은 원리와 경부선 철도, 북쪽은 원리
마을의 상당 부분이 상업지역으로 재래시장 중심부
1914년 조치원리, 1940년 영정(榮町)으로 분리, 1947년 정동으로 개칭, 1988 정리로 개정
원형리정(元亨利貞)의 사장에 기초해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방하다.

명리(明里)
조천이 굽이처 흐르는 하상지역. 1918년 조치원 지도 참고
1926년 조천 제방 축조로 마을 형성 기반 조성
1928년 충북 서평리에서 조치원리에 속함
1940년 욱정(旭町)으로 분리, 1947년 명동으로 개칭, 1988년 명리
이곳에 조치원 변전소(명리 29번지 일원)가 위치해 일대 밝은 빛(전기)를 공급한데서 유래

남리(南里)
읍의 동부 남단부위치. 조천천과 오송 서평리, 남쪽과 서쪽은 철도, 북쪽은 정리와 명리
과거 조천천을 경계로 연기현 북면 침산리와 청주목 서강외 일하면 서평리 지역으로 나누어 져 있었으나 1926년 조천 제방 축조로 현재와 같은 구성을 설정하여 조치원면 조치원리에 속함
1940년 적송정(赤松町)으로 분리, 1947년 남동, 1988년 남리
조치원의 남단. 저지대로 남리 배수장 주변 광활한 연못이 있었으나 1980년대 토지국획 정리 시 매립하여 없어졌다.

침산리(砧山里)
당초는 현재 침산리와 원리, 정리를 포함
1914년 조치원리, 1940년 궁하정(宮下町)으로 분리, 1947년 침산동, 1988년 침산리
침산리는 마을 뒷산이 다듬이돌처럼 길고 평평하다. 일명 방아미

신흥리 (新興里)
연기현 북면에 속해, 당시는 신대리(新垈里)와 백관(百官)을 아우르는 지역
1914년 개편 당시 조치원리, 1940년 신흥정(新興町), 1947년 신흥동, 1988년 신흥리

죽림리 (竹林里)
조선시대에는 연기현 북일면 죽내리 지역이었다.
1917년에는 조치원면, 1931년 조치원읍 관할이 되었다.
1940년 일제의 지명 변경으로 죽림정(竹林町)으로 불리었으며 1947년 죽림동으로 개칭되었다가 1988년 죽림리가 되었다.

번암리(磻岩里)
조선시대에는 연기현 북일면에 속했다. 1914년 북일면과 북이면이 통합될 때 일부를 월하리에 떼어주고 번암리로 북면에 속했다가, 1917년 북면이 폐지되면서 연서면에 소속되었다. 1940년 조치원읍에 편입될 때 일제의 지명 변경으로 번암정으로 불리었다. 1947년 번암동으로 개칭되었고 1988년 번암리가 되었다.
번암(磻岩)은 강 바위라는 뜻이다. 조천과 미호천 합수 지점인 번암 배수장 앞에 넓고 펀펀한 바위가 있는데 예로부터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유명한 곳이다. 중국의 강태공이 위수로 흘러드는 반계(磻溪, 물이름 반)에서 낚시를 했다는 고사에 견주어 그 바위를 번암(磻岩, 강이름번)이라고 작명한 것으로 보인다.
번암진(磻岩津, 배턱동): 과거에 새우젓배가 드나들었던 곳으로 번암바위 인근이다.

신안리(新安里)
조선 시대에는 연기현 북일면에 속했다. 1914년 북일면과 북이면이 통합될 때 옥동리, 옥동(충북지역), 장대리 일부(충북), 신동리(薪洞里)를 합하여 북면에 속했다가, 1917년 북면이 폐지되면서 서면에 소속되었다.
1940년 서면에서 조치원읍으로 편입될 때 일제가 신안정(新安町)으로 지명을 변경했으며 1947년 신안동으로 개칭되었고 1988년 신안리가 되었다. 신동리(薪洞里)와 안터 마을을 합성하여 신안(新安)이라 칭하였다.

봉산리(鳳山里)
옛 지명이 토흥부곡이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연기현 북일면에 속했다. 1914년 낙은리, 동리, 저촌리를 통합하여 동리(東里)로 개칭되어 북면에 속했다가 1917년 북면이 폐지되면서 서면에 소속되었다. 1940년 조치원읍에 편입될 때 일제의 지명 변경으로 봉산정(鳳山町)으로 불리었다. 1947년 봉산동으로 개칭되었고 1988년 봉산리가 되었다.
오봉산 산자락에 둘러쌓여 있는 마을이다.

서창리(瑞倉里)
조선시대에는 연기현 북일면에 속했다. 1914년 북일면과 북이면이 통합될 때 내창리(일부), 서곡리, 평리(일부), 장대리(일부, 충북), 낙은리(일부)를 합하여 내창리(內倉里)라 칭하고 북면에 속했다가, 1917년 북면이 폐지되면서 서면에 소속되었다. 1940년 서면에서 조치원읍으로 편입될 때 일제가 서창정(瑞倉町)으로 지명을 변경했으며 1947년 서창동으로 개칭되었고 1988년 서창리가 되었다. 서곡(瑞谷)리와 내창(內倉)리의 지명에서 글자를 따와 서창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