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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자전거
정려는 살아있다(3)_장응헌의 처 언양김씨 정려 본문

세종시 열녀 정려와의 만남
필자는 요즘 세종시의 정려(旌閭) 중 열녀(烈女) 정려에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우선 세종시 지정 문화유산 일람표 중의 충신, 효자, 열녀 정려를 구분 정리한 다음 면지, 군지 등의 서지 자료와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등의 인터넷 자료를 검색 정리한다. 이후 현장 답사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결과는 사진과 글로 정리하고 포스팅하는 방식이다. 아직 초보단계라서 효율이 낮아 고민이다.
특히 열녀 주인공의 내면을 이해하는 일에 큰 어려움을 느낀다. 당시의 완고한 유교적 문화 환경이라지만 그토록 지독한 열행(烈行)을 실행한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십대의 어린 새댁이 병든 남편을 위해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이는 단지(斷指), 허벅지살을 베어 먹이는 할고(割股), 사망한 남편을 따라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자순(自殉)을 감행하기도 한다. 시부모나 남편의 상(喪)을 당하면 3년간 무덤 곁을 지키는 시묘살이도 행한다
이러한 여성들에게도 주체적인 삶을 살려는 치열한 자아의식이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억누르면서 사회적으로 학습된 '올바른 도리'를 실천하는 과정 중에 깊은 자아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그 갈등을 어떻게 감내하고 다스렸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필자는 그들의 입장이 되어 당시의 상황을 깊이 헤아리고 생각을 정리한 후에야 비로소 글을 풀어내게 되는데 이 과정 자체가 결코 쉽지 않다.
장응헌의 처 언양김씨
이번에 만난 여인은 결성 장씨(結城 張氏) 가문의 장응헌(張應軒, 1609~?)의 처 언양 김씨(彦陽 金氏)이다. 그녀의 정려는 현재 세종시 연동면 송용리 99-3에 위치해 있다.
남편 장응헌은 연동면으로 이주한 장훈의 증손자로, 『연기향안(燕岐鄕案)』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효자로 기록된 인물이다. 정려가 위치한 연동면 송용리는 노송리, 예양리와 함께 결성 장씨 연기파 후손의 집성촌으로 500여 년 전에 들이 넓은 이곳으로 이주해 왔는데, 결성 장씨는 해방 전 송용리 주민의 90%를 차지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부인 언양 김씨는 첨정(僉正, 종4품 벼슬) 김징의 딸로 16세에 장응헌과 혼인하여 시부모와 남편을 정성껏 섬겼다. 그녀는 대소사에 예의가 바른 인물로 기록되었다.


지극한 효행과 숭고한 절개
우연히 시아버지가 병을 얻었는데, 며느리의 정성어린 시탕(侍湯)에도 불구하고 병세는 악화되어 거동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더구나 오랫동안 머리를 빗지 못한 탓에 상투 속에는 보리알만한 이가 득실거려 병석의 노인을 더욱 괴롭혔다.
이때 김씨는 자기의 머리에 참기름을 듬뿍 바르고 80세 고령의 시아버님 곁에서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맡은 이들이 김씨의 머리로 옮겨오게 하여, 시아버지의 머리에 있는 이들을 없앴다고 한다.
이러한 지극한 효성에 대한 일화는 『언양김씨 묘표』와 『장응헌의 묘갈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씨는 83세된 늙은 시아버지와 어린 아이들을 거느리고 피난을 가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오랑캐들이 들이 닥쳤다. 이때 김씨는 남편에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늙고 병든 시아버님과 두 자식들을 무사하고 안전하게 피난시키되, 만악에 온 가족이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경우에는 두 자식을 버리더라도 반드시 시아버님만은 편안하게 모셔야 합니다."
그녀는 가족들을 뒷문으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앞문으로 나갔다. 오랑캐들은 젊은 김씨의 미모에 매혹되어 다른 가족을 쫒지 않고 그녀만을 뒤따랐고 덕분에 다른 가족들은 무사히 난을 피할 수 있었다.
김씨는 계속 강가로 달아나다 드디어 오랑캐에게 잡히자 두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오랑캐들을 꾸진소는 황단이 나루(진목나루, 주목나루라고도 불림. 지금의 세종시 연동면 예양리 북쪽 미호천 중류)의 푸르고 깊는 강물로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 절개에 감동한 강산이 울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본 청나라 장수는 그녀의 정절을 의롭게 여겨 시신을 거두어 표를 쓰고 표를 써서 표목(標木)을 세워주었다. 이후에 다시 쳐들어온 청의 군사들도 그 표목의 글씨를 보고는 그 마을에는 침입하지 않아 온 마을 사람들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란이 끝나자 남편 장응헌은 의식을 갖추어 부인의 장례를 다시 잘 지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 <충청도읍지>, <호서읍지>, <연기현읍지>에 이와 같은 기록이 보이는데 <조선환여승람>에서는 김씨가 달아나다가 물에 빠져 죽었으며 이를 본 청나라 장수가 그녀의 정절을 의롭게 생각하여 표목(標木)을 세워주었다고 기록하여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정려 건립 역사와 건축 특징
1638년(인조16)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하여 왕으로부터 명정을 받았으나, 명정 후 바로 정려가 건립되지 못하고 150여년 후인 1793년(정조17)에 현감의 건의로 나라에서 건립 자재를 지원받아 송용리 나븐말에 세워졌다.
이러한 사실은 1844년(현종10) 유관승(柳觀升)이 기록하고, 7대 손 준상(駿相)이 글씨를 쓴 중수기에 보인다. 이후 1965년 후손 세진, 경순 등이 중심이 되어 정려를 중수(重修)했고, 1971년 도로를 넓히면서 도로 윗쪽인 현재 위치로 이건(移建)되였다.
1980년 후반에 기와를 새로 올리고 단청을 새롭게 했다. 연기군 향토유적 21호로 지정되었고, 2014년 9월 30일 다시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21호로 지정되었다.

정려는 정면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도로에서 정려가 있는 구릉지로 오르기 위해 시멘트 계단을 설치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건물은 화강석재를 가공한 8각 고주초석(高柱礎石)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공포(栱包) 는 이익공(二翼工) 양식을 하고 있고, 창방(昌枋)위에는 1개의 화반대공(花盤臺工)과 2개의 태극문(太極紋)을 올려놓았다. 정려의 좌우 측변(側邊)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시설하였다. 주변은 철재로 둘러 쌓았다. 현재까지는 잘 관리되고 있는 셈이다. 겹처마, 이익공 공포, 창방 위의 장식 등을 보면 사방 1칸의 정려를 아주 정갈하고 품위있게 지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려 내부 중앙에는 1638년(인조16)에 명정을 받은 열부 언양김씨의 정려임을 나타내는 명정 현판 "열부 증 승훈랑 호조좌랑 장응헌 처 언양김씨 지려 묘시월 일(烈婦 贈 承訓郞 戶曹左郞 張應軒 妻 彦陽金氏 之閭 己卯十月 日, 196×39㎝)이 걸려있다. 승훈랑(承訓郞)은 정6품의 품계이고, 호조좌랑(戶曹左郞)은 호조(戶曹)에서 정6품의 관직명이다.
뒷쪽으로는 1793년(정조17)에 진사 조정경( 趙鼎慶)이 지은 '열부김씨정려기( 烈婦 金氏 旌閭記, 45.5*30cm)가 걸려있다.
정려기를 비롯한 중수기 현편들이 부분적으로 낡아 일부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다.
현장 답사 및 후손 인터뷰
네이버 지도에서 '세종시 연동면 송용리 99-3'을 검색해 가면 산밑의 어느 집 옆 골목으로 안내된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 길 우측을 헤매다 결국 길이 없는듯 하여 그냥 내려왔다. 마침 길가 집 문패를 보니 성씨가 장씨였고 어느 한 남성분이 밖에서 들어가고 있었다.
"여보세요!" 하고 주인을 불러 길을 물으니, 정려는 길 왼쪽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 짐작한 대로 그분은 결성장씨 후손인 장중진(68세)였고, 문중 총무인 장내철님은 언양 김씨의 남편 장응헌의 묘는 내판리 403번지에 위치해 있다고 알려 주었다.
마침 언양김씨 연동면 종친회장을 만날 수 있었는데, 대전에서 교직을 퇴직하신 김기웅(74세)님이었다. 김기웅 회장은 우리 언양김씨 가문에 이렇게 훌륭하신 어른을 모시고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면서 본 정려에 대한 세종시의 각별한 배려가 있기를 당부했다.
정려를 찾아가보니 바로 옆에는 '연동 송용리 마애여래입상'이 있었고, 그 아래로 도로와 맞닿은 계단이 나 있었고, 도로로 내려가니 '연동 송용리 마애여래입상' 입구를 알리는 도로 표지판이 있었다. 이쪽에서 올라가는 것이 더 편리할 것 같았다.

정려는 살아있다.
당시 언양김씨의 나이가 궁굼했다. 남편 장응헌은 1609년 생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8년 당시 서른 살이였다. 그녀 역시 비슷한 연배였을 것이다. 16세에 혼인한 이후 10년 이상을 함께 했다면 자녀들도 제법 자라 있었을 시기다. 자식을 사랑하는 에미의 사랑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더말할 나위가 없을진데, 자식보다 83세의 시아버지를 우선해서 구하라는 그녀의 당부는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효를 으뜸으로 여겼던 당시의 시대적 가치관으로서도 그녀의 결단이 예사롭지 않다.
병석에 누워있는 시아버지 상투 속의 이를 잡기 위해 자신의 머리에 참기름을 바른 후 밤낮으로 머리를 맞댔다. 이가 자기에게 옮겨오기를 바란 것이다. 얼마나 기발하고도 눈물겨운가. 상황을 떠올려 보면 지금도 기발하고도 눈물겹다. 그녀는 아마 명석하고 재치있는 며느리였을 것이다. 비록 조선 후기에 일어난 장씨 가문의 어느 효부의 이야기이지만, 과거의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지금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정려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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