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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자전거

그동안 겁이 나서 겨우 50만원 미만으로 구매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런 주식들을 고수익으로 모두 매각하고, 1주당 투자 금액을 200만원으로 상향하기로 했다. 이건 매우 겁이 나는 일이다. 요즘 주식 투자자들의 적중율이 높아진다는 얘기가 있고 나도 그런 면에서 다소 자신감을 얻지만 그래도 겨우 벌어봤자 기만원 또는 기천원인 것은 말이 안된다고 본다. 나는 단기투자자로서 거래가 거의 1-2주만에 완성되고, 목표는 손절가 -3%정도, 익절가 5-10%정로 한다. 이런 매매를 자주하므로서 큰 돈은 못벌지만 손실을 적게 하려는데 있다. 결국 나는 1회 거래로 5% 수익이라면 10만원 정도의 수익을 목표로 하는 셈이다. 어제는 늦도록 HTS를 보면서 이런저런 원칙을 세워보았다. 우선 코스피 상위 100종목 즉..

카메라로 실물을 사진 촬영해 사용하다보면 실물이 정면을 바라보지 않아서 사용하기 곤란한 경우를 종종 만난다. 곤란한 일이다. 조치원에 위치한 봉산영당의 최용소 영정 액자를 비스듬하게 세워놓고 카메라를 어떻게 각을 세워도 정면 사진을 촬영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1)원본 사진 2. 포토샵에서의 해결 ▶ 방법1. Perspective Warp (원근 왜곡) 사용1) Photoshop에서 사진을 엽니다.2) 상단 메뉴에서 Edit > Perspective Warp 클릭3) 사진 위에 그리드(프레임)를 그려줍니다.4)Warp 모드로 전환한 뒤, 프레임의 모서리를 드래그해 정면에 가깝게 왜곡합니다.5)조절 후 Enter 키로 적용 원근보정을 한 후 명도를 조절하고, 거울의 빛반사 부분은 도장툴로 보정하였다. ▶방법..

요즘은 누구나 손쉽게 AI 기반 디자인 툴을 활용해 전문 디자이너처럼 멋진 명함과 로고를 만들 수 있다. 대표적인 툴로는 Canva와 Wix가 있다. 두 플랫폼 모두 무료 플랜으로도 다양한 디자인 작업이 가능하다. ✅ Canvaㅇ수천 가지 템플릿을 제공하는 무료 디자인 플랫폼이다.ㅇ명함, 로고, 포스터, SNS 이미지 등 다양한 디자인을 쉽게 만들 수 있다.ㅇ인터페이스가 직관적이라 초보자도 바로 사용할 수 있다.ㅇ무료 플랜으로도 PDF, JPG, PNG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단점: 고급 이미지, 배경 제거, 브랜드 키트 기능은 Pro 요금제에서만 제공된다.👉 Canva 공식 사이트 바로가기 ✅ Wixㅇ웹사이트 제작 중심의 플랫폼이지만, 로고와 명함 디자인도 지원한다.ㅇAI 기반 로고 메이커..
정부세종청사 옥상정원은 2016년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15개 청사 건물 옥상이 정원으로 전부 연결되어 있어 길이만 전체 3.6km에 이른다. 전체 면적은 축구장 12개 크기(88,279제곱미터)이다.옥상에는 허브원, 유실수 베리원, 넝쿨 터널 등 다양한 테마별 공원을 조성해 310여종 144만본이 자라고 있다. 6월 14일 하루 350명에게만 공개한다.야간개방행사는 오후 7시부터 8시 30분까지 진행한다.저녁노을과 함께 옥상정원을 산책하며 문화 공연을 즐길 수 있다. 거리예술가들이 기타와 판소리 재즈 등 다양한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참가신청은 5.29.~6.03까지 카카오채널 '한글문화도시 세종'을 통해 선착순으로 받은다. 다음달 4일 문자로 안내할 예정이며, 본인 포함 4인까지 할 수 있다.야간..

타블렛으로 유명한 와콤의 중형 블루투스 타블렛이다. 터치패드 태블릿 등 모니터에서 터치 입력이 불가능한 경우나, 드로잉 등 섬세한 작업이 필요해서 마우스만으로는 작업이 어려운 경우 마우스 패드같은 태블릿을 놓고 펜으로 여러 작업을 하면 그대로 pc화면에 입력되는 장치이다. 유선으로 연결하는 모델은 모델명 끝에 WL이 없고, 이런 문자가 있는 것이 블루투스 모델이다. 편의성으로는 당연히 편리함에서 가격이 비싼 점을 극복하고도 남는다. 이 모델은 크기가 153*216mm로 일반적인 마우스 패드와 비교하면 길이는 같고 폭은 약간 좁은 편이다. 일반적인 마우스 패드는 180*220정도이다. 펜의 필압은 여러 후기등을 참조하면 우수한 편이다. 필압이 4096이라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 공부하지 못했다...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사당(祠堂)이나 효행을 기리는 정려(旌閭)를 만나는 일보다, 영정(影幀)을 그려 모시는 영당(影堂)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신도시 세종시 북쪽, 역사적 배경을 지닌 조치원에 있는 영당이라니 더욱 관심이 가는 일이다. 이상하다. 어쩌다 정부에서는 이 영당 이름으로 주인공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조치원읍 봉산리에 있다는 "조치원 봉산영당"으로 이름지어졌을까? 궁굼하고, 영당의 주인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서운할 일이다. 이 영당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활약했던 제정공(齊貞公) 최용소(崔龍蘇, ?~1422)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는 곳으로,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으로 같은 해 12월 31일 세종특별자치시 문..

조치원읍 봉산동을 지나다보면 "연기 봉산동 향나무"를 안내하는 도로 표지판이 있다. 아니 사찰이나 관광 유적지도 아니고 무슨 향나무에 도로 표지판을 세운다는 말인가? 자전거 라이딩 중 친구들과 같이 안내를 따라 찾아간 향나무 입구에는 우측으로 커다란 주차장이 있고, 향나무 근처에는 집터도 있고, 작은 연못과 탑 그리고 비석이 있어 나름대로 많은 이야기를 품은 채로 '나를 설명해 주세요!'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선 봉산동 향나무는 그 크기와 위용에서 감히 범접하지 못할 엄청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고 한 곳에서 뿌리를 내려 굵기와 깊이로 자신이 참아낸 세월을 토해내는 나무를 보는 일은 나이든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하고, 이리저리 꿈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아무 것도 이뤄내지 못한..

이 글의 제목처럼 이 글은 '부강의 만석꾼 김재식'에 대한 세 번째 글로 그가 부를 이룬 연유와 내장원 경이나 궁내부 특진관 직책으로 대한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한 활동에 대한 밝혀지지 않은 일들에 대한 실마리가 될 이야기이다. 필자가 처음 부강에서 조선 말기 대부호의 저택이라는 소개로 만난 김재식 고가는 많이 낡은 상태의 기와집으로 밖에서는 문이 잠긴 상태였다. 아무런 안내판도 없이 썰렁하기만 한 고택을 돌아본 후 처음 찾아 본 것은 부강면지(2015)였는데 그를 소개한 글 중에서 가을 추수를 마친 소작인들이 도지를 바치기 위한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도 흥미로왔고, 그가 단순한 촌부가 아니라 조선황실의 긴밀한 고급 관료였으며 부모에게도 효성이 지극해서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거나, 독실..
내가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는베란다 화초에 물이나 주라고 하네 내가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는은행이나 다녀오라고 하네 내가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는슈퍼마켓에나 다녀오라고 하네 내가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는설거지나 도와 달라고 하네 내가 시를 쓰고 있는데 아내는화장실 청소나 하라고 하네 아니, 도대체 내가 지금시를 쓰고 있다는데! 월간 (2020년 10월호)

선생이 호는 송암이요 시조는 고려조의 개국공신인 태사 충헌공 포음 휘 정필이며 분관시조 결성 장씨 결성부원군 25대손으로, 부친 유강원 참봉 장석환공과 모친 부안임씨의 둘째아들로 1894년 음 1월 23일 충남 연기군 동면 송용리에서 태어나셨다.선생은 유족한 참봉집에서 부족함이 없이 윤택한 유소년 시절을 보냈으나, 17세 때인 1910년 8월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하자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고 조국 광복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이 고민하셨으며 독립을 위해서는 교육에 힘써 많은 인재를 통해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 굳건하게 키워나가는 길 뿐임을 늘 역설하셨다.선생은 유학의 전통이 깊은 명문의 후예지만 신학문에 뜻을 두고 30대 중반에 연기군 동면 송용리에 있는 육영재 또는 송동서숙서당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