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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자전거
공부는 내 인생(-295) 본문
웬만큼 세상을 살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지나온 날들을 파란만장했다고 말하곤 한다. 나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런 얘기를 듣곤 하지만, 내심으로 뭐 그정도 가지고 파란만장하다 할 수 있나 하곤 했다. 텔레비젼에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주위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정말 평범하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평생을 교육공무원으로 살아왔으니 뭐 평탄한 삶을 살아온 셈이다. 그러나 나도 나름대로 다른 교직자에 비해 참 변화무쌍한 경험을 하며 살았다고 생각된다.
나는 6.25사변 때 아버님 직장 피란을 따라 제주도로 내려가셨다가 부산으로 올라와서 태어났다. 그리고 몇년 후 인처으로 다시 올라왔다가 6살에 청양 정산으로 이사를 와서 7살에 시골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썩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으나 동네에 고등학교가 없어 고민하다가 학교 이름만 외우고 인천고등학교를 지원해서 합격하였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다시 공부를 하다가 어려운 집안 형편이나 43세에 맏아들로 나아주신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군대가 면제되고 학비부담이 거의 없는 공주교육대학을 입학했다. 부산-인천-청양-인천-공주로 이동하면서 살아온 셈이다.
당시 교육대학은 학비가 매우 저렴하였을 뿐만 아니라 5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것을 전제로 군대 의무를 면해주는 시절이었다. 나는 이런저런 사정 상으로 불가피하게 입학한 실정으로 학교 공부에 적응하기 어려웠는데, 마침 졸업생과 교원의 수급 불균형으로 3년동안 발령을 기다릴 처지가 되었다. 시골에서 어렵게 학비를 지원해 주시는 부모님과 이웃을 생각해보거나, 당장 시골에 내려가서 지게지고 농사일을 도와야 할 처지는 매우 곤란한 입장이었다. 나는 다시 도서관에서 신문의 신입사원 공채나 공무원 공채 공고를 기웃대면서 기약없이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학벌에 부담이 없는 어느 사원채용 공고를 보고 무작정 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뤄 합격하고, 졸업한 그해 3월 4일 발령을 받았는데 들어가보니 그 회사는 규모가 매우 큰 농업기반조성을 담당하는 국영기업체 본사였다.
회사 생활은 낯설고 어려웠다. 영어 회계학을 응시하고 합격한 회계직으로 입사했으나, 실무경험이 전혀 없고 선후배도 없고 나이도 23세의 어린 나이였다. 처음 기획실 근무를 하다가 현장 경리로 발령을 받았는데 급여를 주거나 복식부기를 이용해서 전표를 써서 지출사무를 보거나 결산을 하는 일은 도대체 감을 잡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이럭저럭 꾸려갔고 무역진흥공사의 수출학교 신입생 시험에 합격하여 3개월 코스의 무역실무를 종합무역상사 직원들과 같이 공부하기도 했다. 당시 종합무역상사는 대한민국 최고의 앨리트였다. 그러던 중 청양 집앞 초등학교로 발령이 나서 직장을 그만두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된 나는 다시 꾸역꾸역 공부를 했다. 학업을 완성하는 일과 다시 서울로 올라가겠다는기대감으로 숭전대학교 야간대학 무역학과 편입시험에 합격하고 대덕군 전보 발령을 받아 3년을 자전거 타고 버스타면서 공부를 하여 정규 4년 대학졸업한 경영학사로 졸업을 하였고, 결국 나는 고등학교 상업교사가 되어 서천 한산으로 발령을 받았다.
소규모 시골 상업학교 교사는 참 많은 과목을 담당해야 했다. 상업부기 기초/ 3급/ 2급, 상업법규, 경영대요, 무역실무 등의 상업과목과 더불어 전자계산일반, 프로그래밍 등의 컴퓨터교과를 가르쳐야 했다. 나는 다시 매일 교안을 작성하고 열심히 가르쳤다. 공부하는 일은 재미있었다. 나는 상업법규를 가르치다가 우연히 공인중개사 자격을 취득하기도 하고, 8비트 컴퓨터를 구입해서 독학으로 공부해서 교내 성적처리, 기능자격증관리, 학생 취업 현황 관리, 직원 급여 계산 프로그램을 베이직으로 작성하기도 하였고, 이럭저럭 5년을 근무하고 1자리 뿐인 대전에 전입하여 광역시민이 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 중에 나는 방송대학 전자계산학과를 편입해서 학적을 갖고 체계적으로 공부하기도 하였다.
대전에 고등학교 교사로 온 나는 전산공부에 취미를 붙이고 활동하다가 대전학교컴퓨터교육연구회를 설립하고 300여명의 회원을 모아서 연수나 세미나를 열기도 하고, 초기 멀티미디어실의 표준을 구안하는 일을 하거나, 연수원이나 연구원에 컴퓨터 강의를 다니고, 학교에서도 컴퓨터 교과를 활성화시키면서 방송대학을 졸업하고 충남대학교 석사과정 박사과정을 수료하기도 하였고, 그러던 중 교육청에서 전산전문직(장학사) 시험에 합격하여 46세에 장학사가 되었다. 나는 전공을 초등교육에서 중등 상업교육으로 다시 컴퓨터교육으로 발전시켰고, 대학은 공주교육대학 한국방송대학 전자계산학과, 숭전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컴퓨터교육전공 석사과정, 본대학원 공업교육학과 박사과정을 마치며, 초등학교 교사에서 상업교사로 그리고 전산교사로 전공을 넓혀갔다.
전산전문직이 된 나는 연구대회를 새로 승인받아 1년에 수억원을 확보하여 140여명의 교사를 불러 교육컨텐츠 개발하고, 원격연수원 플랫폼을 개발하고, 다시 교육정보원을 개설했다 주변의 보통 장학사들은 전에 하던 일을 하게 되어 지난 문서를 찾아 공부하는 일이 일반적이었지만 나는 아무런 참고자료가 없었고 늘 새롭고 합리적인 절차를 개발하여 주위를 설득하면서 일을 추진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고등학교 교감이 되어 나는 정보고등학교의 한계를 인식하고 전통 상업계 고등학교로 전환하기로 하고, 교육부에서 7억을 유치하여 마아켓팅 영역에 집중하는 통상고등학교로 학교를 전환하기도 하였고, 중학교 교장이 되어서는 대전에서 가장 소규모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20억 이상의 예산으로 환경을 일신하고 학업 성적을 향상시켜 초중고 교장 앞에서 성공사례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 다시 통상고 교장을 하고, 지금 집앞 단정한 중학교 교장이 되어 정년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지금도 논어를 공부하고, 이렇게 책을 읽고 서평을 쓰기도 하고, 돌아온 날들을 되새기면서 300일 앞둔 정년맞이 소회를 기록해 본다. 틈나는 대로 섹소폰 연습을 해서 이제 왼만큼 연주가 가능해 지기도 하였고, 교육부 진로교육 컨설턴트나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을 하고 있기도 하고, 대학에서 교육학을 강의 중이기도 하다.
남들은 승진하기 위해 이런저런 고생을 했다고 말하지만, 내게 승진이란 그냥 공부하면서 내가 하는 일에 진력하다가 경험하게 된 우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내가 승진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 일만을 위해 노력했다고 말하기에는 더 많은 과정이 함께 한 일이고,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승진을 하지 않았더라도 뭔가 일을 만들어 더 발전적인 일을 하고자 시도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참 부산한 사람이다.
나름대로 다른 사람보다 변화무쌍한 직장생활을 한 셈이지만,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을 생각해보면 나는 결국 평생 교단을 지켜온 평범한 생활을 한 셈이었다. 제일 보람있었던 일은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적는 일이 투박하지만 익숙해진 일이고, 부단히 공부하는 습관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년을 하면 무엇을 하면서 지낼 것인가? 나는 하던 짓을 하면서 살라는 선배들의 말을 따른다면 공부하면서 살 것이다. 노트북 컴퓨터가 들어있는 백팩은 내 트레이드 마크가 될 것이다. 독서하고 글쓰고 또 여러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는 글을 쓰게 되면 모아서 출판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공부는 늘 나를 신선하게 하고 한편 까칠한 나를 지켜주고 게으를 때마다 책을 읽은 내용보다 그 과정이 더 큰 선물을 주곤 하였다.
논어 학이편 첫절에 배우고 익히는 것이 즐겁고,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기쁘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 군자라 할 수 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공자는 어쩌면 그런 생각을 했을까. 참 신통한 영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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