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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나눔

칼레의 시민

haagam 2012. 3. 27. 11:29

 

"노불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

로댕작 "칼레의 시민"도 불후의 명작이지만, 이 작품에 숨은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숭고한 정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을 따라 올라가면 '칼레'라는 작은 항구 도시가 있다.

인구 12만인 이 항구는 영국의 도버해협과 불과 20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영국과 프랑스 파리의 중간이기도 하다.

 

소 도시인 '칼레'는 세계의 미술품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칼레' 시청에 전시되어있는 로댕의 '깔레의 시민'이란 조각으로 6명이 목에 밧줄을 감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걸아가고있는 조각이다.

 

이 조각은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깔레' 시민의 명예이며 프랑스의 긍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귀족의 의무를 뜻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라는 단어의 상징이 바로 이 로댕의 '칼레의 시민' 이기 때문이다.

 

'칼레의 시민'에 얽힌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때는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이 막바치로 치닫던 1347년이었다.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던 프랑스 왕 필립 6세는 프랑스 북부 도시 칼레의 방어를 포기했고, 끝까지 영국에 저항하던 '칼레'市는 구원군이 오지 않아 그해에 끝내 항복하게 된다.

 

영국왕 에드워드3세는 누군가는 그 저항에 책임을 져야한다며 굴욕적인 항복 조건을 요구하였다.

칼레 시민 중 6명에게 모자와 신발을 벗기고 겉옷만 걸친 채로 서로의 몸을 밧줄로 묶은 뒤 영국 왕에게 칼레 시 성문의 열쇠를 바치게 한 후 교수형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칼레 시민들은 굴욕감과 안도감을 같이 맛보았지만, 누가 6명이 될 것인지는 답이 없었다.

 

이 때 칼레에서 제일 부자인 '외스타슈드 생 피에르'가 가장 먼저 지원하고 나섰다.

그 뒤를 이어 시장인 '장데르'가 나섰고 이에 부자 상인인 '피에르 드 위쌍'이 나섰다.

게다가 '드 위쌍'의 아들마저 아버지의 위대한 정신을 따르겠다며 나서는 바람에 이에 감격한 시민 3명이 또 나타나 한명이 더 많은 7명이 되었다.

 

제일 먼저 형을 자청했던 '외스타슈드 생 피에르'는 제비를 뽑으면 인간인 이상 행운을 바라기 때문에 내일 아침 처형장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자고 제의했다.

 

다음 날 아침 6명이 처형장에 모였을 때 '외스타슈드'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시민들이 그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 '외스타슈드'는 이미 자살한 시체로 변해있었다.

처형을 자원한 7명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살아 남으면 순교자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자신이 먼저 죽음을 택한 것이다.

 

이에 영국 에드워드 3세의 왕비가 이들의 영웅적인 태도에 크게 감동하여 남편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간청하였고, 에드워드 3세는 당시 임신한 왕비의 청을 받아들여 처형을 취소했다.

 

그 후 깔레는 노블레스(귀족) 오블리주(의무) 라는 단어의 상징으로 등장했으며, 537년이 지난 1884년 칼레시 의회는 당시 칼레시를 구한 생 피에르의 기념 동상을 건립하기 위해 기금을 모았고, 조각가 로뎅에게 작품 제작을 의뢰하였는데, 로댕은 10년 작업 끝에 '깔레의 시민'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로뎅의 위대한 천재성은 칼레의 시민 한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진정 살아있는 영혼을 불어넣었다는데 있다.

 

이들이 당연히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일 것이라 기대했던 시민들은 영웅이 아닌 인간의 고통스럽고 침울한,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모습 등 너무 인간적인 모습에 당황했지만 이를 로뎅은 설득했다 한다.

 

이 작품은 6개의 조각을 가까이 하나의 군상으로 설치하거나 하나씩 분리하여 설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청동 주조 작품으로 프랑스 정부의 관리하에 작품을 찍어낼 수 있는데 칼레 시를 비롯하여 12곳에 진열되어 있고 1995년 12번째 마지막 주조품은 삼성생명 건물 미술관인 로뎅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은 서구 사회에서 상류층의 전통적인 미덕으로 자리잡아 왔다. 이 정신이 있어야 부자나 유능한 사람이 비로소 상류층, 지도층으로 올라 설 수 있는 것이다.

 

영국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50세 이하의 영국 귀족 중 20%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영국의 고위층 자녀들이 다니는 이튼 스쿨 Eaton School의 졸업생 중 2천여명이 1,2차 세계 대전 중 전사했다. 1982년 영국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 시 영국 여왕의 둘째 왕자 앤드류가 전투 헬기 조종사로 참전해 전함을 지켰다.

 

한국전에서도 중국 마오쩌뚱 주석의 아들이 전사했고, 미국 24사단의 딘 사단장이 포로가 되기도 하고,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General James Val Fleet의 아들이 전투 중 실종되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클라크 UN군 사령관도 아들을 바쳤으며, 워커 중장은 자식과 함께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은 미국으로 건너가 자선과 기부의 문화를 활짝 꽃피웠다. 카네기와 록펠러에서부터 세계 최대 갑부인 빌게이츠에 이르기까지 자선과 기부는 미국 상류층의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이러한 지도층의 솔선수범 자세는 전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특히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갈등을 누그러뜨리고 상대적 박탈감을 치유하며 부의 정의를 세우고 부자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는데 기여한다. 이런 기부문화는 일반 국민까지 확대되어 미국인의 98%가 어떤 형태로든 기부와 자선에 참여하고 있다는 통계를 보면 이것이 미국을 지키는 힘이 아닐까 생각된다.

 

(학바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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