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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바다 성산포(이생진) 본문

글로 그린 그림

그리운 바다 성산포(이생진)

haagam 2015. 10. 7. 10:26

 

 

살아서 고독했던 그 빈 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난 떼어놀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도 않는다.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드로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는 그 슬픔을 듣는다.

온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만을 보고 있는 고립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나타난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술을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짝 놓아주었다.

365일 두고두고 보아도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그리운 바다 성산포"(이생진의 시)

 

 

 

이생진

1929년 충남 서산 출생(86세,2015년)

1965~1969년 김현승 시인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으로 등단
‘산토끼’ ‘바다에 오는 이유’ ‘그리운 바다 성산포’ ‘섬에 오는 이유’ ‘외로운 사람이 등대를 찾는다’ ‘혼자 사는 어머니’ ‘서귀포 70리길’ 등 시집 31권, 수필집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 ‘걸어다니는 물고기’ 등.
윤동주문학상, 상화시인상 수상

 

이생진선생님을 빼고 성산포를 논할 수 없다.

시인의 힘이다.

당시의 고독한 청년의 누덕누덕 울컥한 모습을 잘 풀어냈다.

시낭송하는 사람들에게 단골 시이다.

감성이 묻어있고 운율이 잘 이루어진 서정시이다.

가을밤에 어울린다. 어제 모임에서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도 한다.

성산포에서 한 사람이 더 태어나는 것을 못보겠다는 말은 난해하다.

이 시를 쓰는 과정의 시인의 동선이 그려진다.

배에 내려 성산포에 갔을 때 아이들이 재잘대다가 지났을지도 모르겠다.

섬꼭대기에 묻어주면 술이 있을까? 바다물을 술이라 생각했는지 철석이는 파도가 취기를 더해주는지 하는 생각도 든다.

그의 고독은 365일 두고 보아도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에 대한 고독이다.

저렇게 곱상한 노인의 가슴을 휘어친 여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가을 아침에 시를 정리하면서 이생진님 덕분에 성산포를 다시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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