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자전거
부강 만석꾼 김재식(1)_톱아보기 본문
세종 부강에 가면 만석꾼 부호 김재식의 고택이 있다. 고택 주변에는 홍판서댁, 조선 독립 운동에 헌신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유허지와 근대 건축물인 부강성당도 있어 세종시의 근세사 연구에 큰 관심을 끌고 있다.
김재식(1860-1928)은 조선 고종 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격동의 세월을 지낸 분이다. 본래 경주 김씨로 청주 낭성 일대에서 집성촌을 이루다가 1910년 부강에 새 집을 짓고 이주하였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큰 부자에게는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그는 얼마나 부자였을까?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지 않았던가? 그는 그 폐쇄된 조선 말기 사회와 일제 강점기 와중에 어떻게 큰 부를 이룰 수 있었을까? 그는 부를 이용해서 어떤 활동을 했을까? 지금도 후손들은 그 부를 지키고 있을까? 보통 사람들이라면 상식적으로 가져볼 만한 궁굼증이었다.
부강면지(2015)에 의하면 김재식은 부강에서 동서남북 사방 팔십리의 땅을 소유하고 있어 그의 땅을 밟지 않고 산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가을이면 도지를 바치기 위해 등 짐을 지거나, 마소에 싣거나, 수레에 곡식을 싣은 소작인들의 행렬이 끝을 보이지 않았고, 도지를 바치려면 사흘 씩이나 기다려야 했으며, 이들을 먹이기 위해 날마다 쌀 두 가마씩 밥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집에서 화로만 한 금덩이가 있었다고도 한다.
김재식은 큰 부를 이루었으면서도 그의 기저에는 효심이 깊고, 천주교 신자로서의 신앙심도 도타우며, 송암집이란 문집을 낼 만큼 학문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부강면지에 의하면 김재식은 효심이 깊어 부모 상을 당하자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으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주일이면 일을 멈추고 청주로 나가 미사를 보았다고 한다. 사후에 그의 자식 3형제가 그가 남긴 글을 모아 그의 호를 딴 2책 2권의 “송암집”을 발간하였는데 그 중의 찬양문 7편은 대부분 김재식의 효행기라 한다.
자신의 별채를 부강성당에 기증한 것도 그의 깊은 신앙심의 발로라 짐작된다. 근대 건축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부강성당 초기에 김재식은 메로놀 외방전교회 소속 선 슈나이더 신부에게 자신의 한옥 별채를 기증하여 성당으로 사용하게 하였으며, 1962년 현재의 성당을 건립한 후에는 사제관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만석꾼 김재식이 69세로 세상을 뜨자 부강에서 장지인 청원근 남성까지 상여꾼들의 발이 젖지 않도록 땅바닥에 베를 깔았으며, 만장 줄이 십리를 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재식이 부를 이룬 경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이야기로 분분하고 불명확하다. 우선 그의 아들 3형제에게서 후손이 없어 대가 끊긴 상태인 데다가 격변의 시대를 지내면서 그의 막대한 재산도 지켜내지 못한 때문이다. 김재식 고택에서 ‘백년옥’을 운영하던 김재식의 고손녀 김정임의 다편적 이야기와 부강면지(2015)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비단과 말 장사를 했으며, 만주로 무역을 하고, 금광을 운영해서 큰 부를 이뤘다고 하지만 이런 피상적인 내용 이외에 아무런 근거가 아직 발견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김재식은 부강에서 만석꾼으로 도지나 받고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선량한 시골 부자만은 아니었다.
그는 1901년(41세)에 고종으로부터 종9품 창릉 참봉에 봉해지고, 1년 후인 1902년(42세)에 당상관 품계인 정3품 통정대부와 중추원 의관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1년 후인 1903년(43세)에는 종2품 가선대부에, 1904년(44세)에는 왕실의 살림을 관장하는 내장원경으로 제수받게 된다. 또한 1906년 의친왕 귀국 후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으니 그는 조선 왕실과 매우 깊숙하게 연이 닿은 인물이기도 하였다.
김재식 가옥에는 의친왕이 내려준 친필 편액(扁額)이 걸려있고, 그의 장례식 때에도 신도비는 의친왕 이강이 직접 찬하고 글씨는 판돈령 원사 윤용규가 썼으며, 판서 민경호가 전서를 썼다고 한다. 묘갈은 참판 이규환이 찬하고 참판 이면상이 행장을 기록했다고 한다. 묘갈도 있는데 참판 이규환이 찬하고, 참판 이명상이 행장을 기록했다. 그의 아들 김학현은 청원군 낭성에 있는 영조 대왕의 태실터를 동양척식주식회사로부터 매입하여 묘를 썼다.
그러나 김재식과 조선왕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마침 2024년 6월 27일 세조시청 4층 여민실에서는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이라는 제목의 포럼이 개최되었다.
이 행사에는 대한제국 고종황제 장증손이자 의친왕기념사헙회장 이준 황손,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후손이자 의친왕기념사업회 사무종창 이영주, 인요한 국회의원, 전 국사편찬위원장이자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인 이태진 교수 등의 발표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의친왕이 김재식을 위해 쓴 ‘송암 신정기’에는 황실직속 정보기관인 ‘제국익문사’ 요원들과 금광을 기반으로 독립자금을 마련한 김재식이란 소개문이 있는데 이는 김재식이 제국익문사의 활동 자금 확보를 위해 금광 개발에 나섰다는 뜻이다.”
“제국익문사의 활동을 위해 경부선 철도를 틀어 부강역을 통과하도록 변경시켜주었으며, 금광 수익을 보부상을 통해 부강포구와 부강역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독립자금을 전달하는데 활용했다.”
“당시 김재식 고택은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이용되었는데, 의친왕을 비롯하여 제국익문사 독리 이호석 대감, 여문 홍순영 판서, 만해 한용운 등 독립운동가들이 찾았다.”
“김재식의 호 송암은 의친왕의 호인 ‘춘암’에서 ‘암’자를 따서 송암이라는 호를 붙여주었다.”
의친왕의 다섯째 딸인 이해경이 1997년도에 출간한 “나의 아버지 의친왕”에서도 “아버지께서는 부강에 들르시면 꼭 들르셨던 곳이 바로 김재식 고가이며 근처 홍순형 대감댁에도 자주 들르셔서 독립운동자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라고 적고 있다.
경부선이 1905년도에 개통했고 의친왕은 1906년도에 귀국했으므로 의친왕이 김재식을 위해 부강역을 만들었다는 말은 허위라는 주장이 있으나, 고손녀 김정임의 증언에 의하면 김재식은 어디를 갈 때면 나랏님께서 기차를 내 주셨다고 말하곤 했다고 하니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닌 듯하여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지난 100여년이 넘도록 우리를 지배해 온 식민사관은 대한제국 황실이 무능하고 부패하여 일제가 우리를 근대화시켜 주었다면서 황실을 비하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대한 황실은 비록 주권을 빼앗겼지만 쉽게 나라를 내주지 않았고 경술국치 이후에도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특성 상 문서나 사료가 남아있기 쉽지 않지만 숭고한 항일운동이 없었던 것이 아니므로 문서 자료가 없더라도 현재 살아있는 후손들의 증언과 적극적인 학술 연구를 통해 이들을 입증해 나가야할 것이다.
마침 부강에는 김재식 가옥은 물론 홍순형 판서의 고택인 홍판서댁, 그리고 독립운동가 박열의 아내로 조선독립운동에 헌신한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의 유허지가 있어 조선황실의 독립운동 근거지로 조명되고 있어 세종의 행정수도 이전에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
거짓말처럼 유족도 없고 흔적도 희미한 채 덩그러니 남아있는 김재식 가옥을 보면 이 낡은 고가가 품고있는 숨겨진 수많은 스토리에 가슴이 뭉쿨하다.
다행스러운 일은 ‘백년옥’이란 식당으로 운영되던 김재식의 고택이 주택사업자의 부지로 매각되어 헐려 없어지기 직전 청주의 실업가인 ‘문화유산 한옥’ 대표 백원기님이 이를 매입하면서 부강의 독립운동 역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는 것이고, 그 뒤에는 오랫동안 관련 자료를 수집 고증하면서 부강의 근세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전 부강면장 이기상 님의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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