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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나눔

어머니의 가스레인지

haagam 2021. 2. 16. 00:33

아침에 갑자기 큰 누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님 전화는 늘 예감이 좋지 않다. 형제 중 홀로 계신 어머님과 가장 가깝게 소통하시기 때문이다. 가까이 사시기도 하고, 또 엄마에게 딸은 아들보다 더 이무롭게 마련이다. 누님은 아주 미안스럽고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어쩌나, 어머님 댁 간병인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어머님댁 가스렌지에 불이 켜지지 않는다네. 참 전에 산 냉장고 값 말야, 우리 회비가 있는데 왜 혼자 부담해? 계좌와 금액을 알려줘.”

 

누님은 무척 미안해하셨다. 고치려면 어디로 연락해야 하는지, 새로 사야 하는지, 사면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또 사게 되면 어떻게 설치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걱정이었다. 팔순이신 누님도 거동이 불편하시다. 원래 가전제품을 장만한다는 것이 슈퍼에 가서 라면 사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나이가 들면서 사소했던 일들이 어려워지곤 한다.

 

어머님은 평소에도 내게 직접 전화하시기를 꺼리신다. 전화를 드리면 늘 괜찮다, 걱정 없다시고, 필요한 것을 여쭈면 역정을 내시며 아무것도 필요 없다 하신다. 여든 살 딸에게 투정하시는 것을 보면 특히 그렇다. 담당 요양보호사의 말에 의하면 며칠 전부터 점화가 잘 안 되어 걱정하고 있었는데, 오늘 드디어 고장이 난 것이다. 어머님은 사흘간 설을 함께 지내면서 애쓴 아들 부부에게 다시 가스레인지 고장 얘기하기가 부담스러우셨던 모양이다.

 

하필이면 오늘은 일정이 꽉 차 있었다. 전화를 받으면서 일정을 살펴보니 오전 10부터 2시간 동안 글쓰기 온라인 강의가 있고, 오후 2시부터는 연수가 있는 등 시간 내기가 부담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하나. 요양보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가스레인지의 제조사나 모델명을 물어보니 모두 영어로 쓰여있어 읽지 못하겠단다.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카톡 친구인 누님에게 보내달라 해서 전해 받았다. 상표는 Magic이었다. 아마 SK Magic인 듯. 아직 9시가 안 되어 콜센터 전화가 어려우리라. 나는 휴대전화 자명종을 9시에 맞춰놓고 인터넷에서 "가스레인지 점화" 등등으로 검색해보았는데 고장 이유의 대부분이 건전지 소모이고 교체 방법을 잘 설명하고 있었다. 9시가 되어 콜센터 문의를 해보니 역시 건전지 교체를 해보고 안되면 다시 연락하란다. 틀림없이 건전지 문제일 것 같았다.

 

그 정도라면 내가 직접 할 수 있지. 나는 오전 연수에 불참을 알리고 불이 나게 차를 몰고 가서 어머님 댁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레인지를 들어 살피느라 부스럭대도 어머니는 전혀 모르신다. 콜센터에서는 손잡이 좌측에 건전지가 있다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없다. 번쩍 들어 살펴보니 건전지는 후면 바닥에 있었다. 스위치를 켜봐도 점화 과정의 소리가 나지 않는다. 건전지 소모가 틀림없어 보였다. 건전지를 빼서 슈퍼로 가서 같은 건전지를 구입해 교체하고 작동해보니 점화 소리가 경쾌하게 나고 불꽃이 전처럼 올라온다. 됐구나. 돈보다 내가 쉽게 해결해서 여러 품이 생략된 것이 다행이다. 어둡던 어머님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님을 뵙는 일은 매일 아련하다. 설이 지나 99, 호적으로 100세가 되셨다. 생신이나 명절이나 항상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번 설에 모시러 가니 나오시다 어려워 그냥 들어가시겠다는 것을 간신히 모셔왔다. 며칠간 함께 계시면서 얼굴이 밝아지시고 식사량도 좋아지셨다. 혼자 계시다가 아들 집에서 이런저런 음식도 잡수시고 특별한 효도가 아니라도 아들 며느리랑 같이 지내는 것만으로 얼마나 의지가 될까. 어머님을 모셔다드리고 집에 온기가 들어오자 인사를 드린 후 나오는 우리 부부에게 거실까지 나오시면서 해맑은 얼굴로 손을 들어 배웅해 주신다. 어머님을 뒤로하고 나오는데 죄스러움에 울컥 눈물이 나왔다.

 

나이가 들면 이런 사소한 일들이 결국 어려워진다. 동네 약국에 들러 눈물 액을 사는 일도, 의원에 들러 감기약을 짓는 일도, 근처 신협에 들러 계좌를 정리하는 일도 모두 어렵다. 더구나 최근에 어머님 댁은 이런저런 고장이 잦았다. 세탁기도 교체하고, 냉장고도 교체하고, 보일러 배관 스위치가 낡아서 수리하기도 했다. 매번 단숨에 쉽게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는 양변기 수전 끈이 삭아 끊어지기도 했다. 형광등이 나가기도 한다.

 

어머님을 모시는 일은 화초를 가꾸는 것과 비슷하다. 정성껏 모셔서 더 오래 뵐 수 있는 것이 그렇다. 잠시만 게을러도 금방 탈이 나신다. 설사하시다가 금방 변비로 고생하신다. 영양 보조 식품과 효소, 유산균 등을 잘 맞춰 드려야 하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들러 혈압약을 타다 드린다. 온 자식들이 수시로 전화 안부를 드리고, 경쟁하듯이 어머님을 뵈러 온다. 여러 사정으로 지금처럼 모시는 환경이 가장 최선이다. 나이 든 어머님이 어쩌란 말인가.

 

나는 어머님께 겨우 연탄 한 장이다. 살면서 아무에게도 따듯한 이웃이 되어준 적이 없고, 지금도 자식에게 인색하기만 하지만, 막상 대안이 없는 어머님에게 아련한 안타까움과 송구한 마음은 피를 나눈 모자간의 본연의 정일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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