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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속의 조치원鳥致院

haagam 2025. 1. 30. 00:01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지금껏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이런 책이 있었는지 몰랐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이 조선시대의 모든 문화와 풍속을 모아 정리한 백과사전으로, 1770년(영조 46년)에 중국의 문헌통고 文獻通考 한국판이 출간되었다는데 놀라움을 갖게 되었다.

 

1769년에 왕명으로 시작된 편찬 사업은 서명응()·채제공()·서호수()·신경준() 등이 주도해, 반년여 만에 상위()·여지(輿)·예()·악()·병()·형()·전부()·시적()·선거()·재용()·호구()·학교()·직관() 등 총 13고 100권으로 완성되어, 1770년 8월에 인쇄되었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이루어져 체재가 서로 어긋나거나 사실의 소략과 착오 등이 많아, 1782년(정조 6) 왕명으로 재 편찬에 들어갔다. 당시 박학강기()로 이름난 이만운()을 기용해 진행된 사업은 1790년에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정조 즉위 후의 사실이 많이 빠져 계속 보완·증보의 작업이 이어졌다.

 

증보 사업은 1797년에 이만운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서명응의 손자이자 호수의 아들인 유구()도 참여했다. 이후에도 이만운의 아들 유준()의 보완 작업이 따랐으나, 기본 골격은 앞에서 이미 갖추어진 대로였다.

 

『증정동국문헌비고()』 또는 『증보동국문헌비고』로 불리는 이 책은 앞의 13고에 물이()·궁실()·왕계()·씨족()·조빙()·시호()·예문() 등 7고를 더해 총 20고 146권을 이루었으나 간행되지는 않았다.

 

대한제국 시기의 『증보문헌비고』 편찬은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문물제도가 크게 바뀌어 이를 반영시키기 위해 『증정동국문헌비고』를 개찬한 것이다. 1903년 1월 법무국장 김석규()의 건의가 채택되어, 홍문관 안에 찬집소()를 두고 박용대()·조정구()·김교헌()·김택영()·장지연() 등 33인이 찬집을, 박제순() 등 17인이 교정을, 한창수() 등 9인이 감인()을, 김영한() 등 3인이 인쇄를 각각 맡아 5년 만에 완성시켰다.

 

개찬의 결과 250권으로 양은 늘어났으나, 분류는 줄어들어 상위(12권)·여지(27권)·제계(, 14권)·예(36권)·악(19권)·병(10권)·형(14권)·전부(13권)·재용(7권)·호구(2권)·시적(8권)·교빙(, 13권)·선거(18권)·학교(12권)·직관(28권)·예문(9권) 등의 16고로 되었다. (이상 네이버 지식백과)

 

 나는 세종시에 살면서 조치원鳥致院이라는 구도심이 세종시의 원조였다는 것을 막연하게 알고 지내다가, 그 지명의 유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세종시의 디지털향토문화대전을 비롯한 여러 기사를 종합해보면 동국여지승람(1481년, 성종 12년 발간)에 청주목 역원驛院 편에는 청주 서촉 39리에 장원場院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위치상 조치원이 확실 시되며,  관영숙박시설인 院원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다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년, 영조46년 발간)의 향시편에 조치원장, 4,9일 개시開市된다는 글이 있어, 이미 조치원이라는 지명이 최소 조선 중기부터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라는 내용의 글을 읽었는데, 이 글이 사실인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라는 책은 무슨 책인지 등등이 궁굼해졌고 위와 같이 잘 정리된 내용을 읽고 새삼 놀라게 된 것이다.

 

그렇구나! 동국문헌비고라는 책이 있었고, 계속 증보되어 대한제국 시기에는 증보동국문헌비고로 발전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정말 동국문헌비고에 정말 조치원이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봐야 학문하던 사람의 자세가 아닌가?

 

 나는 다시  디지털장서각https://jsg.aks.ac.kr/ 을 방문해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찾아, 다시 13고 100권 중 인터넷에서 알아낸 조치원장을 찾아보았다. 

 

책 이름은 "어제동국문헌비고"였고 디지털장서각에서 1770년 홍봉한 저술에서 30책을 선택하고, 목차를 선택하면 20쪽이 향시편으로 안내됨을 볼 수 있다. 21쪽이 향시의 충청도이고, 22쪽에 드디어 조치원은 4일이라는 글이 나오는데, 앞에서 4일은 4일 9일장을 말한다는 설명이 붙여 있어 이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 조치원은 아주 오랜 지명이야!!!  누가 조치원을 일제 강점기에 조천원에서 시작되었다고 함부로 말하는가? 

 

오른쪽 페이지 중앙에 붉은 원안에 인쇄된 "鳥致院 四"는 당시에 조치원이라는 이름의 지명을 사용했으며, 조치원장이 섰고 장날은 4일과 9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조선시대에 조선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초판 이후에도 각 왕조를 거처 수차례의 증보판을 냈으니, 선조들의 기록에 대한 소중한 의식을 새삼 알게 되었고, 우리도 일상을 소상히 기록하는 일에 새로운 가치를 두어야 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래 사진은 증보문헌비고의 표지로 1903년부터 1908년 사이에 발간된 책의 표지이다.

증보문헌비고 표지, 동국문헌비고의 증보판의 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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