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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원 지명의 유래와 발전의 아쉬움

haagam 2025. 1. 31. 10:26

 

조치원읍지(2012)를 읽고 있다. 이 책은 세종시 조치원읍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관련 자료를 총망라하여 조치원읍의 과거에서 오늘까지를 정리한 책이다.

 

목차는 총론편, 마을자료편으로 나뉘며 총론편에는 조치원의 지리, 역사, 행정과 정치, 산업과 경제, 민속, 문화유적, 현대문학 및 기관단체, 교육 및 교육기관, 인물을 서술하였고, 마을자료편에는 조치원읍의 29개 행정리에 대한 답사와 설문을 통해 마을의 문화와 전통, 상활환경과 모습을 서술하였다.

 

 조치원의 선사시대에서 최근까지 조치원읍에 관련된 내용을 서술하였으며, 간결하고 평이하게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고 적고 있다. 각주를 달지 않고 참고자료가 있는 경우 문단끝, 절부분에 명기하였다.   

 

조치원鳥致院은 과거 청주와 연기현의 변두리 경계지역으로 주목받지 못한 작은 마을이었으나, 관영숙박시설인 <院원>이 위치해 있고, 시장이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 상업이 발달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조치원 지명의 유래

 

조치원鳥致院의 이름이 새 조鳥와 이를 치致 그리고 집 院으로 이뤄진 것을 보면, 우선 이 주변이 새들의 서식처로 유명했던 것이 미호천과 금강 그리고 두 물줄기가 합해지는 합강 등 물과 숲이 무성해서 오래 전부터 새들의 서식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치원의 지명 유래에 대한 이야기는 분분紛紛하나 정조 46년인 1770년에 발간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향시鄕市편을 보면 조치원장이 4일과 9일에 열린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일제강점기에 지명으로 강제되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연기현 관련 기록에서는 연기현 지도(1872년 지방도)에 조치원이 비슷한 발음인 저치제언苧峙提堰으로 표기되어 있어 관심을 끄는데, 이는 세종조 연기현감 허만석이 축조한 제방 및 방죽 이름으로 보이며 그 위치는 상리上里와 평리平里 지역으로 비정比定된다.



또한 지금도 조치원 상2리 일원에는 "뗏집거리"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저치제언苧峙提堰의 저치苧峙는 "띠풀 언덕'이라는 의미로 예전부터 뗏장으로 벽을 쌓고 띠풀로 지붕을 엮은 집이 많았던데서 연유한 것으로 짐작되며 조치원의 지명 유래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짐작된다.

 

또한 조치원을 흐르는 조천鳥川도 조치원과 비슷한 이름인데, 1926년 조천제방이 축조되기 이전의 조치원은 미호천과 조천鳥川이 휘돌아가는 범람원氾濫原이었으며 평야지대에서는 농작물이 잘 자라고 천변에는 억새풀 등이 무성하여 새들이 서식하기 좋은 고장이었음을 지명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여러 상황들을 종합해보면 현재 조치원의 지명은 조천鳥川이나 저치제언苧峙提堰 등의 유사 지명과, 새()들의 서식처(致)라는 환경적인 요인 그리고 관영 숙박시설인 원院이 위치한 지리적 여건 등 복합적이고 다양한 지리적 요인들에 의해 유래되었다고 보여진다.

 

**조치원역 그리고 조치원 발전의 아쉬움들

 

조치원의 발전은 전술한 지리적 요건에 어울리게 경부선 철도의 조치원역, 그리고 충북선의 기점으로서의 조치원역이 생기면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으며, 연기현의 청사도 조치원으로 이전하게 되는등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인들이 조치원역을 중심으로 주거지를 형성하면서 동서, 남북으로 도로가 형성되고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도에서 보면 조치원 역 동쪽의 교리, 평리, 원리, 상리, 정리, 명리, 남리 등이 구도심이라 할 수 있다.

 

조치원역이 조치원의 중앙으로 남북으로 길쭉한 원형 모양인 조치원은 역을 깃점으로 북쪽으로는 신안리, 서창리가 있고, 역의 서쪽으로는 봉산리 아래 남쪽으로는 신흥리, 죽림리, 번암리 등이 있다.

 

이 책에는 조치원이 지역 발전의 호기를 놓친 몇 가지 사례를 적고 있어 흥미롭다. 즉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 일이라며 적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호남선 분기점이 대전으로 바뀐 일로서, 1908년 대한제국 정부는 호남선을 조치원에서 분기하여 강경을 거쳐 목포로 가는 안을 채택하였으나 1910년 대전이 분기점으로 되는 안으로 변경 확정되므로써 조치원은 충청권 제1도시로 성장할 기회를 대전에 내주는 결과가 되었다.

 

둘째 충남도청 유치의 실패이다.

1925.09.26.자 동아일보는 당시 도청소재지였던 공주가 교통이 불편하여 도청을 조치원을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 기사를 보도하였다. 이후 공주, 대전, 천안, 조치원 등이 유치를 위해 각축전을 벌렸지만, 1931년 도청소재지는 대전으로 확정되었다. 조치원은 다시 발전의 기회를 잃은 셈이다.

 

셋째 사립명문학교 유치의 기회 상실이다.

당시 김원근, 영근은 1900년대 초반에 조치원에서 상업적 기반을 닦은 사업가로서 교육사업에 의지를 갖고 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1919년 이들은 조치원에 사립 충남중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日警일경의 방해와 관공서의 비협조로 포기하고, 청주로 이사하여 1924년 대성보통학교, 1935년 청주상업학교, 1945년 청주여상, 1946년 청주상대, 1951년 청주대학을 설립하므로써 청주를 교육도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만약 그 당시 조치원에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더라면 명문 교육도시로 성장했으리라 생각해보면 가슴이 시린 일이다.

 

읍지나 면지 등을 읽는 일은 아주 흥미롭다. 내가 최근에 만난 동국문헌비고는 조선 영조 때에 시작된 일인데, 이제는 세상 규모가 커져서 각 읍마다 이런 읍지를 발간하여 읍의 내역을 이리 소상히 기록하고 있으니, 얼마나 보람있는 일인가. 이런 책이 있으니 나같은 범부가 이 책을 읽고 이렇게 포스팅을 하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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