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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엔도 슈사쿠)

haagam 2015. 2. 14. 15:39

 

 

서명: 침묵

저자: 엔도 슈사쿠(김 윤성 역)

출판: 바오로딸(다시 읽고 싶은 명작 02, 1973.7.5. 초판, 2015.8.15.3판15쇄, 그동안 67쇄)

 

 하느님은 정말 존재하시는 것일까?

 

  나는 주일미사 중의 신경 시간에 "하느님을 믿고, 성인의 통공을 믿는다"는 내용을 매일 외우면서도, 하느님이 정말 계시다면 오늘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실 것인가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그분의 뜻이 내가 헤아리는 것보다 훨씬 크고 넓어 내가 미쳐 가리지 못한 더 큰 뜻이 있을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해 볼 뿐이다. 그리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나의 나약함, 이겨내기 어려운 충동적인 본능 앞에서 그나마 나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어, 이웃 사이에서 나를 좀 더 반듯하고 크게 만들어 주시고, 내가 평화를 얻기에 가장 합당한 방법이라는 차선적인 위안으로 다가가고 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하느님이 정말 존재하시는가 하는 물음은 그분의 가르침과 현실이 갈등을 가질 때 일어나게 되며, 현실적인 어려움이 클 수록 그 물음은 증폭되기 마련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어떤 절박한 순간 속에서도 하느님은 침묵하시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일제가 천주교를 박해하던 1600년대를 배경으로 일본에 선교를 위해 파견되는 신부와 신자들의 박해와 배교 와중에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있다. <침묵>이라는 제목을 만났을 때, 나는 사람들이 말로 하는 많은 실수와 묵상 등을 생각하게 하는 침묵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일어나는 천주교의 박해 속에서 일본 선교를 위해 스스로 밀입국한 포르투칼 신부 "세바스티안 로드리고"가 일본에서 숨어 다니거나 잡혀서 심한 핍박과 회유를 당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평범한 인간이으로서 겪는 내적 갈등을 적나라하게 적어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로드리고 신부에 대한 핍박 정도가 강해지고 지속될수록,  책 제목인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저자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는 읽는 내내 크게 궁굼했다. 

 

   로드리고 신부는 자신이 신학교 시절 존경하고 따르던, 먼저 일본에 와서 선교를 하다  배교한 페리이라 신부에게 자신도 배교할 것을 권유받는다.  일본 관리들은 일본의 천주교의 근원을 차단하기 위해 주위에 무고한 일본인 신자들을 거꾸로 매달고 고문하면서 당신이 배교하면 그 사람들을 풀어주겠다 회유하고 있다.  당신이 주장하는 진정한 자비가 당신의 신앙으로 저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하는 것인가를 묻는다. 또한 진심이 아니더라도 성화판에 발을 올리기만 해도 저 사람들을 살려주겠노라 말한다. 로드리고 신부 자신도 삶에 대한 미련을 토로한다. 그는 드디어 일본인 세공사가 만든 서툰 성화판에 발을 올리게 되고, 그 후 일본 정부의 배려와 지도를 받으면서 살아간다.

 

  "신부는 손으로 성화를 들어 올려 얼굴에 갖다 댔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에 짓밟힌 그 얼굴에 자기 얼굴을 대고 싶었다. 목판 속의 구분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짓밟힌 까닭에 마멸되고 오그라든 채 신부를 슬픈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서는 진정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아,아프다." 하고 신부는 떨었다. "그냥 형식 뿐이다. 형식 따위는 어무래도 좋은 일이 아닌가, 겉으로 밟기만 하면 된다.

 

  신부는 발을 올렸다. 둔중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것은 형식이 아니었다. 자기는 지금 자기 생아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게 여겨온 것,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온 것, 인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꿈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이때 밟아도 좋다고 목판 속의 그 분은 신부를 향해 말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짓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다 발을 올려 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먼 곳에서 울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밟은 탓으로 동판이 박힌 판대게는 거무스레한 엄지발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고, 그 얼굴도 너무 밟힌 탓에 움푹 파이고 마멸되어 있었다. 움푹 파인 그 얼굴은 고통스럽게 신부를 쳐다보며 호소하고 있었다. '밟아도 좋다. 밟아도 좋다. 너희들에게 짓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하고 있다.'"

 

  주님의 침묵을 원망했다는 로드리고의 말에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함께 괴로와하고 있었다.

 

   얼마나 무책임한 답변인가? 또한 너무나 현실성이 없는 꿈같은 답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순교로 자신을 증거하는 강한 의지의 인간이나, 로드리고처럼 순한 의지를 갖고 하느님을 증거하다가 어려운 상황에서 성화에 발을 올린 인간이나, 처음부터 배교와 고백을 밥먹듯하는 기지치로나, 모든 이를 사랑하시고, 그 모든 사람들에게 짓밟히시려 오셨을 뿐, 함께 괴로와하실 뿐 우리에게 침묵으로 답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로드리고는 배교 이전에 갖은 어려움과 갈등을 예수의 핍박과정을 기억하면서 힘을 얻었다는 것, 그리고 배교를 한 이후 일본인 이름을 얻고 일본인 아내와 자식을 얻어 살게 되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느낀다는 것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