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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나눔

백락과 천리마

haagam 2010. 12. 29. 08:49



20여년만에 대학 선배를 만났다.

 

정년을 하시고,내가 닮고 싶은정년 이후의삶을 살고 계신듯 하였다.

그중 하나가 서예공부를 하시는 일이었는데, 서예 선생님 자랑을 하면서 실크 목도리를 풀어 선생님이 써주셨다는 한시를 풀어주셨다.

 

한유 잡설이다.

전부터 알아온 내용이기는 하지만, 이제 고희가 가까워지는 선배님께서 나긋한 목소리로 한자 한자 풀어주시는 모습은 매우 정겨웠다. 크천은 원래 흰색이었는데, 형수가 밤껍질로 천연염색을 하셨다는데, 색이 매우 고왔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보았다.

 

한유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사상가로서, 그의 글은 이후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다. 한유 잡설 雜說과 한유 사설 師說 이 있다. 아래 글은 위 목도리에 적힌 한유의 잡설을 정리해 본 것이다.

 

世有伯樂 세유백락, 세상에 伯樂이 있고

然後有千里馬 연후유천리마。 그 다음에 천리마가 있다.

千里馬常有천리마상유,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而伯樂不常有이백락불상유。 백락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故雖有名馬고수유명마, 그러므로 비록 名馬가 있으나

祇辱於奴隸人之手기욕어노예인지수, 다만 말먹이꾼의 손에 욕을 당하다가

駢死於槽櫪之間 변사어조력지간, 마구간에서 다른 말들과 함께 죽게 되어

不以千里稱也 불이천리칭야。 천리마라고 일컬어지지 않는다.

 

馬之千里者 마지천리자, 천리를 가는 말은

一食或盡粟一石 일식혹진속일석。한 번 먹음에 혹은 곡식 한 섬을 먹기도 하는데,

食馬者식마자 말 먹이는 자는

不知其能千里而食也부지기능천리이식야그가 능히 천리를 가기 위해 먹는 것을 모른다.

 

是馬雖有千里之能 시마수유천리지능 이 말은 비록 천리의 능력이 있으나

食不飽力不足식불포역부족 먹는 것이 충분하지 않으면 힘이 부족하여

才美不外見재미불외견재능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且欲與常馬等차욕여상마등 또 보통 말들과 같고자 하여도

 

不可得 불가득그럴 수도 없으니

安求其能千里也안구기능천리야어찌 능히 천리를 가기를 바라겠는가?

策之不以其道책지불이기도, 바른 방법으로 채찍질하지 않고

食之不能盡其材식지불능진기재, 재능을 다할 수 있도록 먹이지 않고

 

鳴之而不能通其意 명지이불능통기의, 울어도 그 뜻을 통하지 못하면서

執策而臨之曰 집책이임지왈: 채찍을 잡고 임하여 말하기를

天下無良馬(천하무양마)。 천하에 좋은 말이 없다고 하니,

嗚呼오호! 오호라!

 

其眞無馬邪기진무마사? 정말로 말이 없는 것인가?

其眞不知馬也기진부지마야! 말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가?

 

한유韓愈 (768 - 824)

 

당대 최고의 문학가이자 사상가.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중 하나로 꼽힌다.

8대가는 당나라 한유, 류종원, 송나라 구양수, 소순, 소식, 소철, 증공, 왕안석으로 중국 당 송대의 최고의 문장가를 의미한다.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이라고도 한다.

보통 청(淸) 건륭제(乾隆帝) 때 시문작가 심덕잠(沈德潛)이 편집한 〈당송팔가문독본 唐宋八家文讀本〉을 가리키는데, 정식 명칭은 〈당송팔대가문독본 唐宋八大家文讀本〉이며 모두 30권이다.

 

회주懷州 수무현修武懸 하남성河南省 출생으로 한족이며, 자는 퇴지 退之, 시호는 문공 文公이다. 당대 唐代 문학가 겸 사상가로 문체 개혁과 시에 있어 지적인 흥미를 정련(精練)되게 표현하는 등 문학상의 업적을 이뤘다.

그의 산문은 중국 산문 문체의 표준이 되고, 제재(題材)의 범위를 넓히는데 영향을 주었다. 평소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와 불교를 배격하였으며, 현재 중국에서 성대 이후 성리학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창려선생집 昌黎先生集> 40권, 외집 外集 10권, 유문 遺文 1권 등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한유 잡설雜說 이외에 사설師說이 있다.

 

798년 진사과에 합격, 36세(803년) 때에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어 경조윤(京兆尹=장안시장) 이실(李實)의 폭정을 공격하였다가 도리어 연주(連州) 양산현(陽山縣)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817년 50세 때 지방 군벌인 오원제(吳元濟)를 토벌하여 그 공적으로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다.

 

819년 헌종(憲宗)이 불골(佛骨, 부처의 유골)을 궁중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을 때 반불주의자인 그는 〈불골을 논하는 표(表)〉를 올려 그것을 막으려 하였다. 그것이 천자의 노여움을 사서 겨우 사형만을 모면한 채 조주(潮州) 자사(刺史)로 좌천당했다. 이듬해 헌종이 죽자 국자제주(國子祭酒=대학 학장)로 소환되어 점차 관계에 세력을 넓혀 관리의 임면을 관장하는 이부시랑(吏部侍郞)에까지 올랐다. 57세에 병으로 죽었다.

문장가로서의 최대 업적은 산문 문체의 개혁이다. 6조(六朝) 이래의
대구(對句)와 음조(音調)를 중하게 여기는 병려체(騈儷體)에 대하여 고문(古文:한대漢代 이전의 자유스러운 형식을 표본으로 하는 의고문)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특히 그의 사상 표명의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복고주의(復古主義)와 결부하여 추진되었다. 뒤에 당송8대가의 필두로서 고문의 대가가 되었는데, 그 이성적이고 감정을 억제하는 경향은 송대 이후의 지식인이 추종하는 바가 되었던 것 같다. 그가 주창한 고문은 중화 민국 시대에 이르러 일상 용어와 일치하는 ‘백화문’이 쓰이기 시작할 때까지 중국 문장의 본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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