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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그린 그림

사평역에서(곽재구)

haagam 2011. 6. 29. 11:11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핓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룹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핓 속에 던져 주었다.

(곽재구)

곽재구의 대표적인 시 '사평역에서'는 1981년작이다.

그는 1954년생으로 알려져 있으니, 1981년에 그는 27살 청년이었다.

그는 이 시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으며, 현재 순천대 교수라 한다.

30년이 넘도록 등단작품이 애송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시를 적어본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육필이 아니어도 좋다.

이 더운 여름 사평역을 만나면서, 그의 순하고 고운 마음을 만나는듯한 마음을 갖느다.

조그만 간이역에 눈은 쌓이고, 기다리는 막차는 오지 않는데,

사람들이 그 막차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고 눈물겹고 정감이 간다.

아름다우면서도 서롭고 힘들면서도 따뜻했던 그 때의 풍경을

소중한 흑백사진처럼 남기고 있다.

수수꽃은 라일락의 다른 말이다.


원래 시집에서는 단락이 없었는데,

가독성을 돕기 위해 군데군데 줄을 나눠보았다.

(글 : 학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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