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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자전거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본문
저녁이면 마당 한 귀퉁이에 모닥불을 피웠다. 모닥불 앞에는 푹신한 밀집 방석을 넓게 깔고 온 식구들이 둘러 앉아 더위를 식혔다. 방 안에는 왕겨 화로불를 지펴 모기를 내쫓았다. 방안에 연기가 가득해질 즈음이면 낮동안 달궈진 더위도 웬만큼 식었다. 어머니는 갓 퍼 올린 시원한 샘물로 등목을 해 주셨다.
세 분 누님을 비롯한 우리들은 모두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우리 6남매의 레퍼토리는 포켓북 형태의 <애창가곡 365>라는 제목의 낡은 책이었다. 저녁이면 책장을 넘겨가면서 이 노래 저 노래 책 한 권을 거의 다 부른 듯하다. 특히 목청이 고운 작은 누님이 선창을 맡았다. 노래를 부를 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치 무대에 선 듯이 바르게 서서 두 손을 모아 잡았다. <아무도 모르라고>, <청산에 살리라>, <그 집 앞> 등이 생각난다.
감자의 대부분은 야린 맛이 나는 자주 감자였다. 광에서 한 바가지 감자를 퍼다가 모닥불에 던져 놓고 때로는 시커멓게 타고 때로는 설익기도 한 감자를 입이 시커멓토록 먹었다. 어느 날엔가 야린 기운이 진한 감자를 너무 많이 먹고 체해서 고생을 했는데 그 뒤로 나는 지금도 감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노래를 부르다 밀집 방석에 누우면 눈이 부시도록 하얀 은하수가 바로 눈 위에서 넘실대며 흘렀다. 나는 그 흔한 은하수를 다시 볼 수 없는 날이 오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은하수 옆으로는 주걱 모양의 북두칠성이 있었다. 눈으로 별을 이어 주걱을 그리는 일은 매번 어려웠다. 주걱 아래 둥근 국자 모양과 휘어진 손잡이를 이어 그리면 그 끝에는 북극성이 있었다. 서산마루에는 이름 모를 큰 별 하나가 밝게 빛났다.
집 근처에 8~9 아름이나 되는 큰 정자나무 마당이 있었다. 정월 보름이면 어른들은 흰 종이 수술을 꿴 새끼줄을 나무에 두르고 불을 지펴 대동제를 올리고 시루떡을 나눠 먹었다. 그곳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우리는 큰 나무를 돌아 숨어가며 숨박꼭질을 하거나 자치기와 딱지치기를 했다. 저녁이면 쓰르라미가 동네가 시끄럽도록 목메어 울었다.
저녁이 어둑해지면 어머님들이 저녁밥 먹으라고 우리를 데리러 오셨다. 가장 기억에 남은 저녁상은 꽁치구이다. 바다가 먼 우리는 생선이래야 소금에 절인 꽁치, 갈치, 고등어가 전부였다. 장에 다녀오시는 날이면 부모님 손에는 잿문지로 둘둘 말아 새끼줄로 묶은 꽁치 다발이 손에 쥐어 있었다. 어머님은 저녁밥을 지으신 아궁이에서 끌어낸 잿불 위에 석쇠를 올려 꽁치를 구워주셨다. 기름이 자글자글 흐르면 꽁치 비린내는 이내 집안에 가득했다. 보리밥 오이냉국과 함께 베어 물던 구운 꽁치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돌아보면 나는 평생을 집에 매여 살았다. 한 집에서 평생을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셋 집을 옮겨다니다 어떻게 내 집을 장만을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이내 이사를 다녔다. 돈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겨우 집 장만을 하고는 30년 살던 대전을 떠나 세종으로 와 낯선 생활을 하고 있다. 역마살 사주가 틀림없다. 주민등록을 떼어보면 이사를 너무 많이 한 탓으로 3 쪽이나 되는 이사 경력이 부끄럽고 아내에게 미안하다.
나는 왜 그 불편하고 불결하고 가난했던 어릴 적 시골 집을 그리워하는지. 생각해 보면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시골집이 아니라, 어릴 적 부모님 품 안의 보살핌과 사랑, 옹색했지만 아무 걱정 없이 뛰어 놀 수 있던 생활, 가족들과 오붓하던 여름밤의 추억, 눈앞에 넉넉하게 흐르던 은하수 그리고 어머님의 꽁치냄새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닌지.
집이란 결국 넓고 편리한 건축물 자체가 아니라 가족끼리만의 일체감을 이루는 끈끈함과 따듯함을 담아내는 그릇일 뿐이었다. 나는 평생을 집을 장만하고 늘리는데 진력하면서도 막상 그 집에 담아낼 온기를 일구는데는 소홀했었구나! 그리고는 지금 그 어릴 적 고향집을 그리워하는 상처 뿐인 영광 위에 있다. 이제 나는 이미 나이가 들었고, 텅 빈 집에서 아내와 단 둘이 썰렁한 집을 지키고 있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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