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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자전거
황위皇位와 바꾼 사랑, 양귀비의 장한가 長恨歌 본문
■ 양귀비를 만남
어느 시대나, 누구에게나 사랑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의 과제이다. 어느 이야기에나 사랑은 그 매개가 되고 있고, 역사를 변화시키는 촉매가 된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은 나라를 위태롭게 할 만큼의 아름다움을 의미하지만 그 어원은 역시 양귀비이다.
지난 여름 우연히 중국 시안(西安)을 들러 당나라 6대 황제,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장한가 長恨歌" 공연을 보게 되었다.
나는 양귀비가 미인의 상징이라는 말을 들었을 뿐, 그 이상 아무런 상식이 없는 상태였다.우리는 차안에서 가이드로부터 장한가에 얽힌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공연을 관람하였는데 그 내용은 매우 소설같이 놀라운 내용이었다. 당 현종이 사랑한 양귀비는 자신의 며느리였다는 것과, 그때 당현종은 60대였고, 양귀비는 20대 젊은 나이였다는 것이다.
국경이 없는 사랑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이 엄청난 대륙의 황제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지를 포기하게 한 당현종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사랑 본연에 대한 질문을 갖게 하였다.
돌아와 우리의 영원한 참고서 인터넷을 뒤적이면서 자료를 모으고 부족하나마 비로서그들의 슬픈 사랑의 서사시 장한가를 정리해 본다.인터넷으로 이런 내용을 알수 있다는 것은참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렇게 웹에게재하기에는 그 근거가 다소 미흡한 부분이있음을 송구하게 생각한다. 많은 부분은 "네이버캐스트 역사인물" 사이트에서공부한 것임을 밝힌다.
사랑이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사랑은 살아가는 과정의 하나의 표현 방법이나 수단일 수 있을 뿐이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모두에 대한 상생 相生의 수단이 되어야 하고, 모두에게 좋은 모습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당 현종은 그런 의미에서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아쉬움이 있어 세상사람들은 이 사랑을 현종의 입장에서 접근하기보다 양귀비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고, 사랑이 여자에게 더욱 값진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은 조물주의 뜻이라고나 해야 할까보다.
그러나 양귀비가 1300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세간의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은 물론 중국에서 이를 상품화한 탓도 있지만, 그 사랑이 너무 파격적이고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은 영원한 숙제가 되기 때문인 것은 아닐런지...
■ 절세 미인 양옥환
양귀비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중독시키느 아편꽃에 양귀비란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그녀의 미모는 어지간히도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본명이 양옥환인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고향 산시성(山西省)을 떠나 쓰촨성(四川省)에 있는 숙부 양립의 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노래와 춤에 능하고 미모가 출중해 이미 17세에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妃가 되었다. 수왕 미모는 당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황제 계승권으로부터는 멀은 수 많은 왕자 중 한명에 불과했다.
수왕과 양옥환이 6년간 결혼생활을 한 것을 보면 양옥환이 당 현종의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천수를 다하며 해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인 박명이라, 6년간 수왕 이모의 아내로 살던 23세에 양옥환은 당 현종 처소의 환관인 고력사의 은밀한 방문을 받는 것으로 비극의 역사는 시작된다.
■ 현종의 여인
당시 현종은 그가 총애했던 무혜비가 죽고 외로와하던 중으로, 정부에서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중국 전역의 미녀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하던 중이었다.
환관 고력사는 드디어 양옥환을 현종의 술자리로 불러내고, 양옥환은 그 자리에서 음악 애호가 당 현종이 직접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자신의 장기인 아름다운 춤을 선보였다. 춤이 미쳐 끝나기도 전에 남녀간의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당시 60을 바라보던현종의 마음에 불길이 당겨진 것이다.
현종은 양옥환이 아들의 아내, 즉며느리라는 사실도 잊은 채 그녀를 품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현종의 구애求愛에 망설이는 며느리 양옥환은 환관 고력사가 특별히 파견한 궁녀들의 설득과 물량공세에 무너지고 마침내 양옥환은 수왕을 버리고 시아버지현종의 여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음모와 파행
현종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우선 양옥환을 화산으로 보내 도교의 도사로 입문시킨다. 당시 도사가 되는 일은속세의 일들이 다 지워지는 과정으로 여겨지는 일로 이때양옥환의 도호는 "태진"이었다.그 사이 미안해진 아들 수왕에게는 위씨 성을 가진 여인과 재혼하도록 주선하였다.
모든 일이 매끄럽게 처리되고 현종은 꿈에 그리던 여인을 맞는다.우선 도사를 모셔와 가르침을 받는다는 핑계로 태진궁을 짓고 양옥환을 살게 하였다. 태진궁은 그들의 아방궁이 된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후 양옥환은 27세에 귀비 책봉을 받아 양귀비가 되었다. 비록 비의 신분이었지만 현종이 황후의 자리를 비워둔 채 지냈으므로 실제 황후와 다름없는 권력을 휘둘렀다.
당현종은 젊어서 정치에 소질이 있는 황제였다 한다.치세 전반기는 현종의 연화를 따 <개원開元의 治>라는 칭송을 받으며 중국 역사 중 몇 안되는 태평성세를 구가하였다.그러나 그는 양귀비를 맞으면서 사랑에 눈이 멀어 정치는 관심 밖의 일이 되었고, 그틈을 타고양귀비를 낀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면서 궁궐은 부정부패가 만연해 지고 백성들의 삶은 급속하게 몰락해 민심은 흉흉해졌다.
현종은 오로지 양귀비뿐이었다.
그를 위해 누대로 유명한 온천, 화청지에 궁을 짓고 오로지 양귀비와 사랑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현종을 양귀비를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 해어화解語花라 칭하고, 그가 즐긴다는 이유로 2천리 밖에 열리는 과일 여주를 매일 공수하도록 하였다.
원하는 사치를 다 누리게 하였음은 물론 권력에도 손을 대어, 그의 6촌오빠 양소는 건달출신 부도덕한 간신배였지만 현종에게 국충國忠이란 이름까지 하사받게 하였다. 그는 현종 말기 대표적 부패 권력으로 "안사의 난"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다.
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잡기 위해 매번 새로운 화장법을 개발하고 목욕을 즐겨 늘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했다 한다.
그는 날씬하고 가녀린 미녀가 아니었다."자질풍염資質豊艶하다." 역사서의 기록이다. 풍만하고 농염하다는 의미이다.
< 화청지 양귀비 조각상과 화청지 내의 양귀비 전용 욕실 해당탕 >
■미인박명
당 현종의 몰락은 양귀비가 총애하던 두 남자 사이의 알력에서 시작되었다.
양귀비는 중국 변경 돌궐족 출신 안산록을 가까이 하였다.그는 일개 군졸에서 용맹으로 공을 세워 일약 중앙정계로 진출한 인물이었다. 20대의 양귀비는 40대의 안산록을 수양아들로 삼고 그를 가까이 하였으며, 양귀비와 안산록 사이에는 지금껏다양한 소문들이 전해진다.이는 그의 6촌오빠 양국충은 안록산이 갈등의 원인이 되자 제거하려 하고, 이를 눈치 챈 안록산은 변방에서 난을 일으켜 당나라 수도 장안가지 쳐들어왔다. 안사의 난이다.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서쪽으로 피난하였다.
장안 100리쯤 가 섬서성 마외파에 도착했을 때 성난 군중과 현종을 호위하던 병사들이 양귀비와 그 일족들을 처벌하기를 원하였다.현종은 사랑과 목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그는 양귀비에게 죽음을 종용한다.그의 뜻을 알아챈 환관 고력사는 양귀비가 자결아닌 자결로 생을 마무리하도록 하고, 그의 시체를 수습해 인근 조그만 산에서 장사를 지낸다. 경국傾國의 책임을 그에게 돌린 셈이다.
양귀비의 끝, 미인박명이다.(719-756.6.15, 38세)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양귀비와 함께 죽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양귀비가 죽은 후 그는 황위를 아들 숙종에게 물려주고 양귀비만 그리워하다 그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그녀를 지키지 못한 회한과 그리움에서 6년을 살다 762년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685-762)
■뒷얘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양귀비의 아름다움이 너무 대단해 고력사와 군졸들이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고 일본으로 그녀를 탈출시켰다는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양귀비는 그후 30여년을 일본에서 더 살았다 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과 사당, 무덤이 일본 야마구치현에 있는데, 실제 양귀비 후손이라는 족보를 들고나온 사람도 있다 한다.
■백거이의 장한가
백거이는 당나라 시인으로 유려평이流麗平易한 문체로 당대를 통해 가장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하였고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장한가 비파행 등이 있다.
그는 당 현종이 죽은 지 50년이 지나 백거이 나이 35세에 왕질부와 진홍이 그를 찾아와 선유산에 놀러 갔다가 현종이 양귀비와의 로맨스가 화제에올랐다. 이때왕질부가 이 내용으로 글을 지어보라는 제의에 시인의 상상력을 발휘해 백거이는 시로, 진홍은 산문으로 그들의 신화적인 사랑이야기를 애절하게 지었다.
내게 시선을 끄는 일은그가 당현종의 실정을 탓하지 않고, 둘 사이의 사랑에 촛점을 맞추어 글을 지었다는 것과, 그 이름을 장한가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백거이에게 그 둘의 사랑은 결국 커다란 서러움, 긴 한으로 비춰진 것이다. 백거이의 장한가 싯귀는 "비익조와 연리지"와 같이 알게 모르게 우리 귀에 익숙한 구절이 많고 너무 유명해서 몇 구절을 옮겨본다.
*
칠월칠일 칠석날 장생 궁궐전에서
아무도 없는 오밤중에 둘이서 서로 만나 속삭이던 말
하늘에서는 날개를 짝지어 날아가는 비익조가 되게 해주소서
땅에서는 두 뿌리로 한 나무로 엉긴 연리지가 되자고 약속했지요.
하늘과 땅이 아무리 장구하다 하여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이 슬픈 사랑은 영원히 끊어지지 않으리라.
*
연꽃 휘장 속에서 보낸 뜨거운 봄밤
봄밤에 너무 짧아 해가 높이 솟았구나.
황제는 이날 이후 조회에도 안나오네
후궁에 미인들은 3천명이나 되었지만
3천명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네.
금으로 치장한 궁궐에서 화장을 끝내고 기다리는 밤
백옥 누각에 잔치 끝나면 피어나는 몸
*
서쪽으로 도숭 문 백여리를 나오더니
어찌하오리 여섯 군대 모두 멈추어서네
아름다운 미녀 굴러 떨어져 말 앞에서 죽으니
꽃비녀 땅에 떨어져도 줍는 이 아무도 없고
비취깃털 공작비녀 옥비녀마져도
황제는 차마 보지 못해 얼굴을 가리고
돌아보니 피눈물이 흘러 내리네
■서안 화청지 장한가 공연
중국 서안은 13대 황실의 수도가 되었던 유서깊은 역사의 도시이다. 그리고 양귀비의 화청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저녁이 되면 화청지를 중심으로 산과 그곳 연못을 이용해 스펙터클한 화청지 공연이 이루어진다.
레이져를 이용해서 분수벽에 화려한 장면을 연출하고, 와이어를 통해 이곳저곳에서 입체적으로 사람이 움직이는 생동감을 준다.
나는 안내원이 사진촬영을 못하게 하여 사진을 못찍었는데, 너무 고운 사진이 인터넷에 검색되어 양해를 구하지도 못한 채 사진을 올려본다. (올리고 보니 뉴시스 사진이라 되어 있다.)
관람석 앞 분수대에서 물줄기를 올려 수막을 만들고 레이져를 쏘아 후면에 양귀비를 비추고 있다.
공연 입장권이다.
공연료에 대한 느낌은 주관적이므로 뭐랄 것은 없지만, 공연 관람 후의 느낌은 모든 사람들에게 한동안 울림을 주는 것은 사실인듯, 인터넷 이곳저곳에는 장한가 이야기가 심심치 않다.
왕안이 지음, 유병례 옮김 은행나무 간(2009.10.04) 소설 "장한가"가 있다.
■장한가 長恨歌 詩 白居易(백거이 772-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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