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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5

haagam 2012. 4. 6. 09:17


나무들5

무게를 견디는 자여
나무여
새둥지처럼 불거져 나온 열매들을
추스르며 추스르며
밤에도 잠자지 않네

실하게 부푸는 과육
가지가 휘청이는 과실들을
들어 올려려
들어 올려라
중천의 햇덩어리
너의 열매

무게가 기쁨인자여
나무여
늘어나는 피와 살
늘수록 강건한 탄력 장한 힘이더니
그 열매 추수하면
이 날에 잎을 지우네

김남조(1927~)



이 시는 조선일보에서 얻었다.

시를 읽다 나무를 표현하는 시어들이 매우 서정적인 느낌으로 눈에 들어와서 읽다보니 김남조 님의 시였다. 제목은 나무5이다. 아마도 나무를 주제로 한 연작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블로그에 시인의 사랑초서를 옮겨 적으면서 그가 사랑에 대한 구구절절 애틋한 느낌에 대한 근원지가 궁굼하다 말한 적이 있었는데, 다시 만난 시가 우연히 김남조인 것을 보면, 그의 쉽고 감성적인 시어가 읽기에 용이한 모양이다. 난해한 시를 내가 아직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시를 추천한 한양여대 교수이자 시인인 장석남은 이 시를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즈음 나무들 곁으로 가야한다. 귀 기울이면 분주한 나무들의 노동요 소리가 들린다. 뿌리로부터 빨아올리는 물기와 양분들, 가지 끝에는 금방이라도 연두의 잎사귀들이 학교 파한 아이들처럼 쏟아져 나올 것 같다. 불그스레한 꽃봉오리가 뚜벅뚜벅 걸어나온다. 과연 어디서부터 오는걸까? "

무게가 기쁨이 삶이란 말은 얼마나 경건한 삶의 자세인가! 내가 지고 있는 이 짐은 감사의 대상인가? 고통의 대상인가? 늘어나는 삶의 짐에 대한 강건한 탄력이 생긴다면 그것이 기쁨이라 말한다.

시를 쓰는 일은 시를 쓰기 위해서 쓰는 것일 수 없고, 시를 쓰는 것이 멋있어 시를 쓸 수는 없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도 이렇게 멋있는 시를 쓰고 싶은 부러운 마음이 든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는 정말 선천적인 재능과 지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내 입장에서 언감생신이다.

가지가 휘청이도록 하게 부푸는 과육을 보며 들어올려라 응원하고, 중천의 햇덩어리라 말하는 재치는 얼마나 힘있는 응원이고 감동이다. 나무들은 이 열매를 들어올리느라 스스로의 무게를 추스르며 추스르며 밤에도 잠을 자지 않는다.

늘어나는 피와 살, 늘수록 강건한 탄력 자한 힘이여!

이런 싯귀들은 한편 삶에 대해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은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우리가 소홀히 생각하기 쉬운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가치관들이 얼마나 값진 것이며, 우리가 다시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를 웅변한다.

삶이란 결코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며, 늘 진지하고 겸손한 자세로 투명하게 지낼 것을 요구한다.

무거운 신문 한 모퉁이의 시는 하루 소식의 청량제이다.


삶의 짐이 충만한 기쁨이었는데,

나무는 열매를 추수하면 그 날에 잎을 지운다.


(학바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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